‘문화를 짓는’ 사람들   2024.7월호

수런거리는 침묵: 매체로 메시지를 재현하는 화가

: 화가 이택구



문신
 시인ㆍ편집위원


'숲에서 부는 바람' 한지 부채



유월, 나무는 자기가 왜 나무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 무성한 잎과 물오른 둥치 그리고 자기 형상을 닮은 푸른 그늘까지 나무는 오로지 나무만이 형상할 수 있는 자세로 존재한다. 햇살은 또 어떤가? 유월 햇살은 다른 계절과 달리 직선적이다. 저간의 사정 같은 건 허용하지 않을 듯 사물을 향해 내리꽂힌다. 예리하고 날카롭고 공격적인 태도를 통해 햇살은 햇살의 존재 이유를 우리에게 설득한다. 이렇듯 세상 모든 존재는 스스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일로 온 생애를 보낸다. 나무와 햇살과 돌과 풀이 그렇다. 모든 존재는 ‘왜?’라는 물음표를 자기 내부에 드리워놓고, 그 고리에 걸리는 존재의 숨통을 응시한다. 물음표에 걸린 존재는 온 생애를 걸고 몸부림치며 고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그 치열한 순간을 빛나게 하는 게 바로 생명력이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기 응시의 물음표에 걸린 존재의 몸부림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했다. 이를테면 그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의 리듬 같은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뭇잎을 흔드는 건 바람이 아니라 나무 자체의 열망이다. 온통 나무의 열망으로 술렁이는 숲은, 그러니까 존재의 생명력이 들끓는 처소와 같다. 그런 상념으로 전주시 남쪽 자락인 남고산성길을 올라갔다. 숲은 멀리서 보면 한없이 고즈넉하지만, 숲의 한가운데 들면 여간 소란한 게 아니다. 숲은 소리 없이도 소란하다는 말이 고스란히 실현되는 처소다. 그래서일까? 이택구 화가의 작업실과 마주했을 때, 나는 수런거리는 침묵의 세계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침묵하는 존재의 집

이택구 화가에게 남고산은 들끓는 침묵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침묵의 아우성은 그의 예술 세계에 자주 영감을 주었고, 그러는 사이 그는 침묵하는 존재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밝은 귀와 맑은 눈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해온 일련의 예술 작업은 영매의 주술처럼 숲의 심연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폭로라는 거친 말보다는 자백, 그렇다, 고백이 아닌 자백이라고 하는 게 옳다. 다시 말하지만, 이택구 화가의 작업은 끝내 침묵하고자 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존재 이유를 자백하게 만든다. 그러한 작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주제가 ‘집’이다. 존재의 집.


제 작품의 어딘가에는 집의 모양이 있어요. 저의 심볼 같은 미니멀이죠. 작품에 집의 모양이 들어가긴 하지만, 집이 중심이 아니에요. 집이 있고, 그 곁으로 무심하게 구름이 흘러갑니다. 그러니까 집 자체가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거죠. 이 과정에서 홈타운 이야기를 해요. 집의 어떤 중요함을 얘기하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집 자체를 보여주는 건 아니에요. 실체로서의 집은 아니지만, 우리가 어느 공간에 가면 아늑하고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죠. 나의 존재와 뭔가 통하는 그런 곳, 그런 곳이 바로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집은 부분이자 전부다. 그건 그의 작업 방식에서 비롯한다. 칠팔 년 전부터 이택구 화가는 캔버스의 정형에서 벗어나 다양한 매체를 메시지로 활용해오고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매체는 고온에서 열처리한 탄화목. 탄화목은 수분을 극한으로 제거한 까닭에 뒤틀림 같은 변형이 거의 없다. 게다가 나무의 질감과 무늬는 그 자체로 예술적 존재감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택구 화가의 작업 과정은 나무의 존재에 자기 존재의 영감을 불어넣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의 영감이 하나의 작품이라면 탄화목은 그 작품을 품는 집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또 한 번 일어난다. 탄화목 작품이 크고 무거운 까닭에 해외에서 전시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는 한지를 종이죽처럼 짓이기고 겹발라 판화처럼 찍어낸다. 그는 탄화목의 굴곡과 입체를 지면으로 옮김으로써 원본으로부터 새로운 원본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존재의 집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집이란 뭘까? 그가 해온 작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형상에 도달하게 된다. 지붕이다. 지붕은 한 존재를 품고 생명을 기르는 형상이다. 그 지붕 아래에서 인간은 세대와 세대를 이어왔다. 오목대에 올라 한옥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이택구 화가가 매료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지붕이었다. 하나의 지붕은 하나의 우주였고, 그 우주마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상상은 집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시원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전주한옥마을 원불교 교당 외벽에 설치한 타일 벽화 ‘전주의 봄’은 집과 지붕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상징이다. 20×20cm 타일 500장을 850도가 넘은 고온으로 구워 붙인 벽화의 부제를 ‘마이 홈타운’이라고 붙인 건 집이 단순한 구조적 실체를 넘어 인간 존재의 심연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곳이 모든 존재의 안식처, 다시 말해 존재를 가장 존재답게 해주는 처소라고 그는 생각한다.







김대성 장인과 협업 제작한 합죽선



존재의 진경(眞境)을 그려내다

이택구 화가에게 지금 존재의 처소는 남고산성길 끝자락에 비켜 서 있는 작업실이다. 오래전 그곳은 세 채의 집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가내수공업으로 지우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는 지금 한없이 자유롭다. 물론 곡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불이 나서 수많은 작품이 잿더미가 된 기억도 있다. 그에게 화재 사건은 존재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캔버스라는 틀에서 벗어나 매체의 본질에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탄화목과 한지를 활용한 작업은 새로운 영감으로 가득했다. 매체 자체가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중에서도 그가 머무르고 있는 남고산성의 역사와 시간은 매력적이었다. 지금은 숲이 되었지만, 오래전 남고산성에는 많은 사람이 살았다. 여러 개의 우물이 있었고 집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다. 이것이 이택구 화가가 남고산 자락에 터를 잡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남고산 자락은 역사와 시간을 품고 있는 존재의 거대한 집이었던 셈이다.


2021년 교동아트센터에서 개최된 그의 열두 번째 개인전 <회화 작품으로 만나는 산성마을>에 그 모든 게 녹아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시간은 진경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역사란 존재하기를 초월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택구 화가는 ‘지금-여기’ 부재하는 역사적 존재의 이야기를 진경의 세계로 풀어낸다.


아늑한 원시시대부터 인간의 삶은 산과 물 그리고 숲을 함께 동경해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욕심으로 인해 전쟁 자연 훼손 삶을 위협하는 행위를 하지만 결국 자연을 동경하다가 자연으로 간다는 표현을 해본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과 작품 속 이미지 사이의 관계(닮음)를 내포할 뿐 아니라 또한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는 관계를 함축한다. 재현은 필연적으로 서사(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에게도 회화의 표현에 있어서 구상적인 것을 피하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도 재현이다. 얼핏 보면 페인팅으로 착각할 것 같은 회화성을 보여주는 표현들은 나무를 판각한 결과물(무늬)이다. 나뭇결의 색, 질감을 회화적 감각을 추가시킴으로써 목 조각을 회화적 영역으로 확장시키기 위함이다.


윗글은 작품 <풍류(風流) 달>(탄화목, 60 x 61)의 작가 노트다. 그에게 진경의 세계는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과 맺는 관계”를 재현하는 이야기다. 나무를 판각하고 거기에 회화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그는 나무의 존재와 자기 존재의 관계를 재현해낸다.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하나로 재현해내는 그의 작업은 “목 조각을 회화적 영역으로 확장”해가는 일처럼 다른 세계로 자기의 예술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그건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시절을 지나 매체를 부각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아니, 매체 자체를 메시지화 하는 일이다. 재현되는 진경은 그런 것이다. 의도와 욕망이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한 존재의 존재 이유가 다른 존재를 통해 구현되는 것. 그게 진경의 세계다. 그러므로 진경의 본질은 존재의 침묵에 있다. 잎도 꽃도 뿌리도 없는 한 알의 보잘것없는 씨앗이 그 자체로 모든 가능성이 되는 것처럼, 언어도 의미도 의도도 욕망도 없는 침묵이 진경이자 진언(眞言)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존재의 무늬를 그려내는 이택구 화가야말로 존재의 진경이자 진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세계는 오롯이 존재의 집이 될 것이다. 이택구 화가가 예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수런거리는 침묵의 집.




'숲에서 부는 바람' 한지 부채





사진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