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유산 된 한글서예  2025.1월호

우리의 언어, 서예의 재료가 되다





과거 서예는 일상과 연결되는 중요한 기록의 수단이었다. 조선의 명필 한석봉은 매일 폭포 아래에서 글씨 공부에 매달려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서예 하나로 명성도 얻을 수 있던 시대였다. 현대에 오며 서예는 본래의 역할인 기록의 쓰임을 다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가치는 남아있다. 글씨를 쓰는 사람의 감정과 인품, 지혜를 풀어내는 힘이다. 


당시 군자나 선비의 기본적인 덕목에는 글씨를 잘 쓰는 것이 속했다. 그러니 ‘글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는 의미의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도 전해진다. 후한 말의 학자이자 서예가 채옹의 『필론』에는 이런 말도 있다. ‘서자산야(書者散也)’, ‘글씨라고 하는 것은 풀어놓는 것이다’. 우리는 먹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를 통해 마음에 품은 회포를 풀고 내면을 가다듬곤 한다. 서예가 전하는 이러한 가치는 빠르고 복잡한 세상에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일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어떤 글을 그리며 마음을 풀어내고 싶을까?” 질문해본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한글’ 서예의 소중함이 고개를 든다. 낯선 한자보다도 우리의 언어인 한글이 재료가 될 때 서예가 가진 힘은 제대로 발휘된다. 진정한 ‘서자 산야’를 실현하는 것이다. 오래 전 한글이 창제되었던 목적은 모든 국민이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드는데 있었다. 한글서예의 가치도 이와 닿아있다. 어렵고 고리타분한 예술이 아닌, 누구나 쉽게 접하고 느낄 수 있는 독립적인 예술장르로 한글서예는 발전해오고 있다.






사실 한글서예는 오랫동안 한자서예에 비해 연구되어 오지 않았다. 한글의 역사가 약 600년이 지난 반면 한문은 3천 년이 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서예는 한자를 대상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오직 한자로 쓰인 글만이 서예의 범주에 허용되던 때도 있었다. 한글서예에 대한 용어나 서체의 정의는 비교적 최근에야 이루어졌다. 한글서예는 흔히 조선 왕실에서 쓰이던 궁체와 전통 판본체, 민간에서 널리 쓰이는 민체 등 다양한 서체와 필법이 전해진다. 특히 민체는 효봉 여태명 서예가가 새롭게 발굴한 서체로, 한글서예의 폭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한글서예가 점차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며 정형화된 한자서예에서 벗어나 한글 작업에 주목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서예보다도 친숙한 ‘캘리그래피’가 등장한 때를 떠올리면 쉽다. ‘아름답게 쓴 멋글씨’ 정도로 해석되는 ‘캘리그래피’라는 용어는 1990년 말에서 200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캘리그래피는 일상과 좀 더 밀착된 서예로 통한다. 사용하는 도구의 차이를 제외하면 흔히 서예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 일반 서예보다 대중에 가깝다보니 캘리그래피 작업을 함께하는 서예가들이 생겨났다. ‘서예학원’ 대신 ‘캘리그래피 공방’을 열고 서예의 문턱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익산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캘리그래피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한소윤 작가는 한글서예이론가로도 활동 중이다. 서예 분야에서는 드물게 이론가의 길을 걷는 그는 한글서예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통해 아직 발굴되지 않은 한글서예의 숨은 이야기들을 전한다. 최근에는 전북 지역의 한글서예 작가들이 뜻을 모아 만든 전북한글서예협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서예가 임성곤 씨가 오랜 시간 한글서예를 애정해오며 이룬 결실이다. 전북은 전국 최초의 서예과로 문을 연 원광대학교 서예과를 통해 많은 서예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대부분이 중견작가나 원로의 길에 접어들며 한자서예가 중심이 되어왔지만, 앞서 소개한 작가들과 같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글서예에 주목한 움직임도 늘고 있다. 




     


여태명 작(왼쪽), 2024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기념공모전 대상작. 황지영의 ‘가을의 기도/김현승’




전북의 서예문화가 견고하게 자리 잡은 데에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의 역할도 있었다. 1997년 첫 행사를 연 이후 올해로 15회째를 맞는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는 오랜 시간 지역의 서예 정신을 지켜온 존재다. 이번 국가무형유산 한글서예 지정에도 앞장선 이들은 최근 한글서예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2024년도 기념공모전의 대상 수상작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매회 공모전은 한글보다 한자서예 작품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지난 공모전에서 황지영 서예가의 한글서예 작품인 <가을의 기도>가 대상작으로 선정, 학생서예 공모전 역시 구단아 학생이 정자로 단아하게 쓴 한글서예 작품이 대상을 받으며 한글서예 분야의 활약이 돋보였다. 


단 한 번의 붓질로 마음을 써내려가는 ‘일필휘지(一筆揮之)’를 실천하기 까지. 그 간단해 보이는 움직임 안에는 3~40년 넘게 갈고닦은 긴 세월의 힘이 숨어있다. 그 힘을 바탕으로 화선지 위에 아름다운 문장을 그리는 일. 누군가에게는 글 자체가 전하는 학문적 울림을, 누군가에게는 한글의 곡선과 형태가 지닌 미적인 가치를 전하며 한글서예는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 자산이 되고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