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태명의 민체  2025.1월호

민중의 글씨, 이름을 얻다


전주 톨게이트 현판




1990년대 초 한글서예는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바로 '민체'의 탄생이다. 민체는 한글서예의 기존 서체인 판본체와 궁체와 구분되는 서체다. 국가유산청은 민체를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개인화된 민간 서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서민들이 즐겨 사용했으나 특별히 이름을 얻지 못했던 서체에 '민체'란 이름을 붙여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서예가 효봉 여태명이다. 한글 서예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효봉은 1990년대 초반, 자신의 논문에서 처음 ‘민체’란 이름을 내놓았다. 


효봉 여태명은 진안 출신으로 오랜 시간 원광대에서 제자들을 배출하며 현대 서예의 방향을 탐색해 온 서예가다. 그가 한글서예에 빠져든 것은 1991년이었다. 독일의 베를린 종이 박물관에서 열렸던 전시 '한중일 서예작가 초청 작품전' 현장에서 그곳의 기획자가 한국의 서예가들은 왜 중국의 문자를 쓰냐고 물었다. 효봉은 마침 출품했던 한글서예 작품을 보여주었다. 기획자는 그제야 관심을 보이며 한국 서예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한글서예를 중심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여태명 작(2019)



그는 헌책방을 다니며 직접 수집한 1천여 권의 고서를 통해 한글 서체를 연구했다. 소장하고 있던 <용비어천가>, <송강가사>, <열녀춘향수절가> 등을 영인하여 한글자전(字典)을 만들었다. 그 많은 고서 중 조선시대 민중들이 사용하던 글씨가 담긴 필사본이 유독 눈에 띄었다. 멋드러진 기교가 있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민초들의 소박한 삶이 보이는 듯 했다. 곧 이 글씨들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고, '백성 민'자를 따 민체라고 명명했다. 그가 이름지었기에 민체는 한때 '여태명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자서예는 주로 양반들을 중심으로 하는 취미와 교양으로 여겨졌다. 덕분에 예술 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글은 반포 이후 주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 주로 사용되는 글자였기에 예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적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명필로 불렸던 추사 김정희 또한 한글을 남기긴 하였으나, 부인에게 보낸 40여 편의 편지가 전부이고 본격적인 '작품'이라 할만한 것은 없을 정도다.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한자서예가 해서, 초서 등 여러 서체로 분화된 것에 비해 본래 한글서예는 판본체와 궁체 두 가지만 존재했다. 판본체는 훈민정음을 반포할 당시의 서체로 흔히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 등 인쇄물에 사용된 서체다. 한정된 틀 안에 네모반듯하고 꽉 차게 들어서며, 획순이 엄격한 것이 특징이다. 나무에 조각하여 찍어낸 글자이기 때문에 서예 특유의 붓놀림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궁체는 궁중에서 상궁들이 주로 사용하던 서체다. 우아한 곡선을 나타내며 엄격하고 진지한 느낌이 있다. 특유의 '삐침'은 궁인들이 임금에게 고개를 숙여 조아리는듯한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두 가지 서체 모두 가독성이 좋고 각자의 조형미가 있지만, 변형에 한계가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 표지석(위), 문화체육관광부 현판




민체는 기존 한글서예 서체가 가지고 있던 확장의 한계를 보완했다. 엄격한 형식이 존재하는 다른 서체들과는 다르게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표현된다. 글자의 형태도 들쭉날쭉하고 자유로워 민중을 연상케 한다. 대충 쓴 글씨 같기도 하지만, 그 자유로움 속에서도 조화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기에 입문은 쉬워도 일정 수준 이상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민체는 이러한 특징들을 바탕으로 빠르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효봉은 전주 톨게이트와 문화체육관광부의 현판, 국순당의 복분자주 '명작' 로고, 남북정상회담 기념식수의 표지석 등도 이 민체로 글씨를 썼다. 


한때 보수적인 전통 서단은 한글을 향한 그의 행보를 '이단아'로 치부하기도 했다. 한자서예에 비해 한글서예 자체도 비주류인 현실에서 민중들이 쓰던 소박한 글씨가 어떠한 취급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효봉은 옛것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닌 새롭게 나아가는 것을 더욱 중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민체에서 더 나아가 한국캘리그라피디자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여러 난관 속에서도 사람들의 일상에 서예를 들여오기 위한 노력은 그러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의 민체 대중화의 노력은 꾸준히 이어졌다. 아직 컴퓨터가 대중적으로 보급되기도 전인 1998년, 민체를 컴퓨터용 한글 폰트로 개발한 것. 개똥이체, 흰돌체, 검은돌체, 푸른솔체, 민체, 축제체 등 여섯 가지로 나누어진 민체는 한 장의 CD로 담겼다. 획기적인 변화였다. 직접 서예를 하거나, 서예가에게 의뢰를 해야만 했던 과거와는 달리 컴퓨터 서체 하나만 다운받으면 간편하게 서예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는 KBS 예능 ‘1박 2일’의 로고도 바로 효봉 개똥이체로 쓰였다. 민체의 활용은 활발하다. 지금은 음식점의 간판, 화장품과 같은 생활용품 등에서 두루 사용되며 우리들의 일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효봉 여태명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