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유산 된 한글서예  2025.1월호

한글 서예를 이론으로 연구하는 이유

한서예가 예당 한소윤


한소윤



한글서예, 좋은 글감과 근거 있는 서체로부터 

익산 모현동 주택가의 한 공방에는 타고난 서예 덕후(?)가 살고 있다. 낭랑한 목소리와 밝은 에너지를 지닌 서예가, 예당 한소윤 씨다. 은은한 먹향이 퍼지는 공방 안은 벽마다 한글로 쓰인 서예작품이 빼곡하다. 꾸준히 한글서예에 주목해온 그는 캘리그라퍼이자 한글서예가, 한글서예이론가 등으로 불린다. 주로 이 공간에서 작업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외부 강의도 활발히 하고 있다. 한글서예를 다루며 작가는 잘 쓰기 위한 노력만큼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일에도 힘을 쏟는다. 스스로를 ‘활자 중독’이라 칭할 정도로 매일 읽고,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글감을 그때그때 모아둔다. 이는 모두 화선지 위의 좋은 재료가 된다.


제가 직접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에게 아직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게 아쉬워요. 그래서 쉴 새 없이 좋은 글을 찾아요. 거리에서 발견한 짤막한 글도 좋고 시집도 많이 읽죠. 김용택 시인이나 박노해 시인, 우리 지역의 복효근 시인의 시도 좋아해요. 서예에서 주로 쓰는 공자나 맹자, 사서삼경도 현대적인 느낌으로 해석하면 또 다르게 표현할 수 있거든요. ‘이제 작품을 만들어야지’ 생각할 때 글감을 찾으면 늦어요.


흔히 내 방식대로 잘 꾸며 쓴 글씨는 모두 서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글자 하나하나에도 다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못생긴 글씨라도 나름의 규칙과 정확한 근거가 있어야 ‘서예’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궁체와 민체를 바탕으로, 집자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집자는 옛 소대성전과 같은 문헌에서 필요한 글자를 일일이 찾아 모으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모아진 글을 토대로 서체를 완성하고 서예만의 예술적 감각을 더한다. 글자의 강약을 만들고, 행과 행의 어울림을 고려해 아름다운 구도를 그리는 것이다. 한문과 비교해 한글은 우리가 평상시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습관이 더해지기 쉽다. 그만큼 더 유심히 관찰하고 집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가을밤




서예를 사랑한 소녀

서예 이야기를 하는 내내 작가의 눈빛은 반짝반짝, 소녀 같은 천진난만함이 전해진다. 그의 서예 사랑은 11살 꼬마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우연히 서예학원에 갔다가 첫눈에 반하듯 서예에 빠졌다. 방학이면 아침부터 도시락을 싸들고 학원으로 향했다. 당시에도 서예를 배우는 학생은 많지 않았기에 또래 친구들 대신 직장인 언니, 오빠와 어르신들 사이에서 서예를 배웠다.  


제가 막 서예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던 1989년도 원광대학교에 전국 최초로 서예과가 생겼어요. 어른들이 ‘소윤이도 나중에 크면 서예과에 가겠네’ 이런 말들을 하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다른 친구들이 남아 야자를 할 때 저 혼자 서예학원에 갔어요. 막차 버스가 올 때까지 혼자 연습하는 시간이 외롭기도 했죠. 그리고 원광대 서예과에 들어갔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저처럼 서예를 하는 친구들이 서른 명이 넘게 있는 거예요. 그때 같이 전공실에 모여 작업을 하고 서예 이야기를 나누며 대학 생활 내내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요. 


한글서예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선 건 대학교 1학년 무렵. 한글서예의 맥을 이어온 산돌 조용선 선생의 책 『봉셔』를 접한 순간이었다. 책은 한글서예의 여러 서체를 복원해 전하고 있다. 이 귀중한 자료를 펼치는 순간 매료된 그는 무작정 책에 적힌 연락처를 수소문해 조용선 선생을 찾아갔다. 학교 밖의 세상에서 또 다른 스승과 인연을 맺으며,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해 한글서예를 공부했다. 이때 서예의 큰 인물들을 많이 만나고 배우며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웬만한 열정으로는 불가능한 일. 어느새 베테랑 서예가가 된 지금도 서예를 향한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도산십이곡 8수




삶의 희로애락 담아내는 서예의 힘 

1990년대에 들어서며 원광대학교에 이어 계명대와 대구예술대, 대전대, 경기대학교에 차례로 서예과가 개설되었다. 이런 변화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이어지던 도제식 교육에서 나아가 전문적인 서예 이론과 실기를 통해 하나의 학문과 예술로서 서예가 발전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힘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경쟁력이 약한 서예는 대학의 구조조정 속에 살아남지 못하며 줄줄이 폐과의 운명을 맞았다. 전국 최초의 서예과라는 의미를 지닌 원광대 역시 교수진과 학생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문을 닫으며 현재는 대학원의 서예문화학과만이 운영되고 있다. 현실이 이렇듯 서예는 여전히 ‘옛것’으로 통하며 사람들의 관심 밖을 서성이는 신세다. 그럼에도 한소윤 작가는 씩씩하다. 서예를 알리는 일이라면 앞장서 움직일 준비가 되어있다. 


몇 년 전 가출청소년들이 있는 보호쉼터에 수업을 다닌 적이 있어요. 아이들이 의욕이 없다보니 어떻게든 흥미를 끌어보려고 라면 10개를 종류별로 가지고 갔어요. 봉지에 적힌 글씨를 똑같이 쓰면 이걸 다 주겠다고 했죠. 그럼 아이들이 조금씩 열정을 갖고 재밌어해요. 하루는 마음껏 욕을 쓰게도 해봤어요. 그때 한 아이가 붓을 확 꺾으며 감정을 담아 쓰는데, 글씨에 마음이 투영된다는 게 바로 저런 거구나 싶었죠. 그 순간만큼은 아이들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해소하며 잠시나마 치유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작가는 이런 경험을 통해 서예의 힘을 실감한다. 글을 다루는 예술로서 서예는 감정을 분출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붓 끝에 온 신경을 모으니 집중력에도 이만한 예술이 없다. 그는 앞으로도 젊은 세대가 쉽고 편하게 서예를 즐기는 날이 오길 꿈꾼다. 개인적으로는 직접 쓴 글로 작품을 남기고 싶은 꿈도 꾸고 있다. 단순히 예쁘게만 쓰는 글씨가 아닌, 서예 안에 담긴 희로애락을 사람들과 오래도록 나누며 살고 싶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