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전시장의 문을 열면 아들은 마당의 잔디를 깎으며 정원을 가꾸고, 어머니는 카페에서 커피를 내린다. 예림미술관의 일상적 풍경이다. 전주 도심에서 20여 분만 차를 타고 달리면 김제 금구면 한적한 마을에 예림미술관이 있다. 이 허허벌판에 미술관을 지은 이들의 정체는 조각가 임석윤 씨의 가족이다. 꽃 대신 다양한 작품이 피어있는 조각공원과 그림이 걸려있는 카페, 체험관과 작업실까지. 아버지와 아들은 3천여 평의 넓은 땅을 오롯이 문화와 예술로 채웠다. 부자는 이 공간을 통해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부자의 손으로 짓다
아버지 임석윤 씨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작가이자 미술관장으로 매일 바쁘다. 조각의 1세대 원로작가이자 긴 시간 교직 생활을 해온 그는 퇴직을 계기로 평생의 꿈이던 미술관을 지었다. 삼형제 중 첫째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아들 임민택 씨가 그 과정에 함께했다. 건물 설계부터 벽돌 하나하나 정원의 나무 한 그루까지 이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임민택 작가는 직접 중장비 자격증도 땄다고 하니, 그 열정과 애정이 공간에도 묻어난다. 그렇게 2021년 봄, 예림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임민택ㅣ저희는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하다보니 예술가들을 위한 공간을 먼저 염두하며 전시장을 지었어요. 작품의 규모에 제한이 없도록, 또 작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천장을 아주 높게 만들었습니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육중함이나 형태감들이 잘 드러날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어요.
현재는 체험교육에도 집중하며 미술관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아들이 직접 강사로 나서 아이들의 아트체험을 담당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학생을 모으는 일부터 어려웠지만 꾸준히 경험을 쌓아오니 이제는 예약이 조기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다. 공간 운영부터 강의 활동, 각종 미술협회 활동까지. 임민택 씨는 최근 바쁜 일상 탓에 개인 작업을 할 시간도 부족하다. 그러나 본업인 조각에 충실하기 위해 올해 새로운 개인전을 계획하는 등 작가로서의 삶도 놓치지 않고 있다.
예림미술관
닮은 듯 다른,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
미술관 지기로서 함께하는 관계가 아닌, 조각가로서 두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임석윤 선생의 작품 세계는 ‘상대주의’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그는 동양의 음양사상을 바탕으로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입체와 평면, 이상과 현실을 함께 표현한다. 어쩌면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작품을 눈으로 보고나면 그 의미가 단번에 다가온다. 대학 시절, 영화 <로마의 휴일> 속 배경에 반해 조소를 시작한 그는 캔버스 안에 갇히지 않고 무한히 표현할 수 있는 조각의 매력에 더욱 빠져들었다. 조각하는 아버지 곁에서 세 아들은 고스란히 그 DNA를 물려받았다. 모두 미술대학을 나왔지만 임민택 작가가 유일하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각을 전공했다.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10여년 넘게 공부하며 그 역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이뤘다. 아버지가 상대주의에 주목했다면 아들의 작업은 ‘비움의 미학’을 향한다. 그는 하나의 덩어리에서 비워나가는 형식으로 작업하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을 통해 서로 전하는 메시지는 다르지만, 사람들은 부자의 작품을 보며 ‘닮은 듯 다르다’고 평가하곤 한다.
임민택ㅣ오랜 세월 아버지의 작업을 접하다보니까 모방하기만 하면 답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작가는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중요해요. 중국 유학을 하면서 장자가 쓴 ‘소유’에 대한 글을 본적이 있는데 여기서 ‘비움’에 대한 힌트를 얻었어요. 굳이 가득 메우지 않아도 비워가며 형태를 잡으면 그것 또한 입체의 매력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임석윤ㅣ작품을 만드는 과정은 고뇌와 즐거움 그 자체입니다. 조각은 힘을 써야하는 예술이다 보니 작품을 하는 동안 힘이 많이 들죠. 재료를 두드리고 깨고, 완전히 노동이에요. 하지만 그만큼 완성했을 때 내 의도대로 작품이 나오면 기쁨도 더 큽니다.
임석윤, ‘비천’(위), 임민택 ‘공간part’
따로 또 같이 꾸는 꿈
부자는 지금의 공간을 통해 또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국제적인 조각심포지엄을 여는 일이다. 단순히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개념이 아닌, 세계의 조각가들을 초청해 이들의 작업 과정을 관객들이 직접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 토론과 세미나 등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자리도 계획하고 있다. 도심에서 살짝만 벗어나도 문화와 예술은 소외된다. 이들은 김제의 작은 동네에도 활발히 문을 여는 미술관이 있고, 새로운 문화가 모일 수 있음을 이런 노력들을 통해 계속해서 알리려 한다.
임석윤ㅣ이곳이 전주와 가깝다 보니 3~4년 사이 많은 예술가가 이 동네로 작업실을 옮겨 자리를 잡기도 했습니다. 그 예술가들과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전시도 열고 있어요. 올해로 세 번째 전시를 가졌습니다. 미술관을 중심으로 이런 일들도 가능해지니 좋지요.
예림미술관을 중심으로, 김제 금구와 금산면에서 작업을 하는 미술인들은 ‘금미회’라는 이름으로 뭉친다. 지역미술의 활성화를 위해 의기투합하며 갈수록 함께하는 회원도 늘고 있다. 낯선 땅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작은 움직임을 실천하는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배작가와 후배작가. 이들은 조급함이 없다. 관람객이 북적대는 당장의 성공보다는 느리더라도 오래오래 지금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한다.
임민택ㅣ짧은 시간 갑자기 성장한 식당은 오래 유지를 못하더라고요. 실패도 하고 아쉬운 것들을 경험해봐야 그 안에서 노하우가 쌓인다고 생각해요. 결국 오랜 시간 꾸준한 곳들이 기억에 남는 맛집이 되는 것처럼, 저희도 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일단은 하고 있는 일들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대단한 홍보나 마케팅보다는 앞으로도 저희가 처음 생각했던 목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정체성을 다지며 나아가고 싶어요.
글/사진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