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석 Ⓒ전주문화재단
무심코 버린 쓰레기도 그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악기가 된다. 대금연주가 황보석 씨의 이야기다. 환경이 예술인들의 주제가 된지 오래지만, 국악과 환경의 만남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국악인으로 살아온 그는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다 버려지는 물건들을 활용하여 PVC 피리, 깡통 양금, 파이프 실로폰 등 많은 악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업사이클링 악기 제작자는 이제 그의 '부캐'가 되었다.
그는 전통예술집단 노닥을 이끌며 순창 옥천고을대취타의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연주실에서는 쓰레기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 온다. 쓰레기로 만든 악기, 그 악기로 만들어내는 연주를 마주했다.
옥수수 통조림도 두드리고 보자
연주자로 살던 그가 악기를 만들게 된 시작에는 코로나19가 있다.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던 팬데믹 시기, 국악인인 그도 오랜 시간 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시작했던 여러 시도 중 하나가 악기 제작이었다. 힌트는 학교의 버려지던 장구에서 얻었다. 나무로 된 몸통 부분이 깨져 버려지는 장구들이 많았는데, 양편에 있는 가죽은 온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버려진 장구를 다시 쓸 수 있게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실험을 하던 게 어느새 여기까지 왔다.
그는 짧은 길도 허투루 걷지 않는다. 곳곳에 악기의 재료가 있기 때문이다.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 발견한 PVC 수도관은 피리가 되었다. 옥수수와 꽁치 캔 통조림에 쇠줄을 연결했더니 양금이 되었고, 포장마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는 타악기의 일종인 카혼이 되었고, 카페 한구석 버려져 있던 커피원두통은 북이 되었다. 한 번은 직접 고물상으로 재료를 공수하러 갔는데, 그때의 기억이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pvc 휘슬
박스 베이스
다들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해결하기 위해 실천하는 일은 드물잖아요. 저도 비슷했는데 악기를 만들면서 많이 바뀌게 된 것 같아요. 폐품을 얻기 위해 고물상에 갔는데, 쓰레기가 정말 산처럼 쌓여있는 거예요. 누구나 그걸 직접 보면 환경에 대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심각하다는 게 현실로 다가오게 된 거죠. 예술인이니 이렇게 예술 활동으로 사람들에게 그 현실을 알리려 하고 있습니다.
업사이클링, 새로운 예술의 시작
그가 제작하는 악기가 실제 공연할 수 있을 정도의 소리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2년이 걸린다. 연주자였기에 기본적인 악기의 구조와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제작의 영역은 또 다른 문제였다. 독학으로 직접 연구하며 만들어갔기에 시행착오가 많았다. 생각하면 마음 아픈, 떠나보낸(?) 악기도 많다. 베이스의 역할을 기대하고 박스와 고무줄을 엮어 만들었던 악기. 박스는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졌고, 연주할 때의 소리도 좋지 않았다. 현실과 상상은 다른 것임을 느껴 힘이 빠질 때도 있었지만 악기를 완성할 때마다 따라오는 성취감이 그를 계속 나아가게 했다.
피리 만들 때도 그랬어요. 분명히 소리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완성하고 나니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는 거예요. 분명히 내가 연주하던 악기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는데 왜 소리가 안 날까 생각했어요. 계속 보다 보니까 문제점이 뭔가 하나씩은 있더라고요. 그걸 고쳐가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지금까지 하고있는 것 같아요. 결과가 잘 나오면 너무 행복해요.
2023년에는 그간 만들었던 악기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공연 <즉흥적 발상>이다. 한국 전통 음악과 재즈가 만난 새로운 음악들을 업사이클링 악기들로 연주한 이 공연은 전주문화재단의 신진예술가 지원사업에 선정되며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실제 공연을 진행해 보니 업사이클링 악기는 마이크만으로는 소리의 울림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등의 아쉬움이 있어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악기들을 보완하고 있다.
작년에는 순창 지역 학생들과 함께 특별한 음악 교육을 진행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직접 버려진 폐품으로 피리, 실로폰, 셰이커 등의 악기를 만들고, 합주를 연습하고, 공연 발표까지 마무리한 1년 간의 대장정이었다. 악기를 집에 가져가서 연습해 올 만큼 수업의 열의는 뜨거웠다. 아이들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악기'라는 점이 더욱 애착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악기 제작을 넘어 더 큰 꿈이 있다. 열 가지가 넘는 업사이클링 악기를 완벽하게 완성하고, 악기마다 어울리는 곡을 하나씩 작곡하여 앨범을 내는 것이다. 그 시작으로 지난 공연에서 PVC 피리를 주선율로 작곡한 '평원을 날다'가 초연되었다. 어림잡아 7년 후에는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며 웃는 그는 빽빽하게 들어선 객석을 바라보며 공연을 시작할 그날을 꿈꾼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