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얄팍한 수준의 시선이 그를 향할 때, 이 흥미로운 인물로부터 끄집어낼 수 있는 키워드는 크게 세 개다. 첫째는 신념이고 둘째는 용기이며 셋째는 여유.
그에게 신념은 정의(正義)와 맞닿아 있다. 다만 그 신념과 정의가 특정한 이념과 연결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그가 가진 도그마가 있다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깊은 존중, 그리고 그 존엄을 바탕으로 인간이 사회에서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용기. 이 사람에게 용기는 헌신과 맞닿아 있다. 모든 용기가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용기가 이기심과 붙으면 타인의 존엄과 자유를 훼손한다. 음험한 욕망은 시대를 녹슬게 한다. 세상에 피와 폭력을 부르기도 한다. 반면, 그는 자신이 가진 용기에 헌신을 보탬으로써 부조리로 휘청거리는 주변을 세심하게 보듬었다.
마지막 키워드는 여유. 그가 가진 여유로움은 웃음을 통해 표출된다. 제아무리 세상 사는 게 팍팍해도 끝내 웃는 자가 승자다. 그는 이 진리를 태생적으로 습득했는지도 모른다(유머란 모름지기 노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재능 아닌가!). 그의 타고난 익살꾼 기질은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그 또한 스스로 글을 써서 만천하에 자신이 재담꾼임을 뽐내고는 했다.
회식이나 잔치 자리 같은 데에서 친구들은 나보고 몸도 약하고 하니 이런 때 많이 먹고 살 좀 찌라고들 한다. “많이 먹고도 여전히 빼빼하면 더욱 면목이 없게 될 테니까 아예 안 먹겠네.”(…중략…) “왜 그렇게 말랐는가?” 좀 민망한 표현으로 물어오면 나는, “가뭄이 심해서 그러네.”하고 웃어넘긴다.
<산민객담 : 한승헌의 유머산책> 중에서
우선 한승헌 변호사의 이력을 간단히 톺아보자.
1934년 전북 진안군 안천면 生. 전주고등학교와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를 거쳐 1957년 1월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3년의 군 법무관 생활을 거쳐 1960년부터 1965년까지 통영과 서울 등지에서 검사로 재직했다.
1965년 9월 변호사로 전직한 후 같은 해 10월 그는 소설가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 변호를 맡게 된다. 이때부터 법조인으로서의 그의 삶이 전혀 다른 궤도에 들어선다. 동백림사건, 통혁당사건, 김지하 <오적> 필화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사건 등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변호인단 이름에는 한승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꼭 끼어있었다.
남들만 변호했는가,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 자신이 수인(囚人)이 되기도 했다. 서슬 퍼런 대통령 긴급조치의 유신 시대 한복판에서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1975년 3월). 그해 8월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3년을 받고 구금 9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같은 해 12월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유죄판결이 확정되어 그는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했다.
그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궁정동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 민주주의의 봄을 꽃피울 줄 알았는데,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이 그 섣부른 기대를 짓밟았다. 1980년 5월 17일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간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엮여 다시 옥살이를 해야했다. 1년 후 형집행면제로 풀려난 그는 1983년 8월에야 변호사직 복권이 이뤄져 다시 법률사무소를 열 수 있었다. 한승헌 변호사는 이후에도 부천서 성고문 규탄 집회 사건, 보도지침 폭로사건,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등등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 해왔다(그의 저서 <분단 시대의 법정>을 읽어보시라. 감탄사가 절로 나올 것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그는 감사원장에 취임했다.
법조인으로서도 빠듯한 삶이었을 텐데 그는 젊은 시절 시집을 두 권이나 낸 시인이었으며,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 백수 시절에는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차리기도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MBC S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 등등은 그의 이력에 자그마한 부록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 수많은 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승헌을 변호사로 기억한다. 연전연패. 변호인으로서의 승률이 턱없이 낮은 그였지만, 한승헌은 엄혹한 시대를 향해 계속해서 돌직구를 던지고 또 던졌다. 그 우직함의 팔 할은 아마도 그의 타고난 유머가 든든한 뒷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기부란 말의 영어 donation은 한국어 ‘돈 내쇼’에서 나와 ‘돈네이숑’―‘도네이션’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러니 도네이션의 어원국(?) 답게 기부문화 창달에 모두 참여합시다.”
위의 책 91쪽
(소설 <즐거운 사라> 마광수 교수 변론 중) “단상의 재판관 여러분께서 이 소설을 읽고 성적으로 흥분하실 분은 아마 한 분도 안 계시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따라서 피고인에게 무죄의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1심 판결은 ‘유죄’였다. 나는 중얼거렸다. “역시 젊은 법관들이라서 흥분했던 모양이군.”
위의 책 96쪽
(1987년 6월 항쟁의 어느 집회장에서) “여러분! 의사들 중에서 하필이면 치과의사들이 앞장서게 된 이유를 아십니까? 그 까닭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이를 갈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 156쪽
2022년 4월 20일, 한승헌 변호사는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그의 주변 사람들은 한승헌 표 아재 개그를 직접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책은 남았다. <산민객담 : 한승헌의 유머산책>(2004)이 그의 부재로 인한 허허로움을 달래줄 것이다. 한 권이어서 아쉬워할 사람들을 위해 그는 후속편을 두 권 더 썼다. <한승헌의 유머기행>(2007), <한승헌의 유머수첩>(2012)이 그것이다. 유머도 부지런해야 일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인가. 그의 근면성실함은 웃음에 있어서도 시절이 따로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대단한 인물이 동시대를 누비다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