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   2024.4월호

(한) 남자의 일생

존 윌리엄스, ‘스토너’



이휘현
 KBS전주 PD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지내다 정년퇴임 했으니 어찌 보면 번듯한 인생을 살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게다가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내와 그사이에 태어난 예쁜 딸까지 염두에 두면,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의 삶은 여러 군데에서 곪아 있었다. 대학 내에서는 교수들끼리 종종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 다툼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도 있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성인이 된 외동딸은 대학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임신해 도망치듯 집을 떠났다. 영문학자로서 그가 남긴 저서가 한 권 있었지만 학계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교수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했던 그는 정년퇴임 후에도 제자들 사이에서 특별한 인상으로 기억되는 스승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잊혔다. 그리고 죽었다. 


소설가이자 영문학 교수이기도 한 존 윌리엄스(1922-1994). 그가 장편소설 <스토너(Stoner)>를 미국에서 발표한 건 1965년의 일이다. 첫 출간 후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2010년대에 유럽 독자들로부터 시작된 <스토너> 신드롬은 이내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당시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를 누렸다. 유럽과 미국을 넘어 한국 독자들의 마음까지 휘어잡은 <스토너>. 이 소설의 마력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 궁금증을 안고 설레는 맘으로 책 페이지를 펼친다면, 여러분은 분명 실망할 것이다! 4백 페이지 가까운 번역본에는 한 평범한 인간의 생몰(生沒)이 담백한 필체로 펼쳐져 있을 뿐, 그 흔한 영웅담이나 막장 서사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도대체 <스토너>의 무엇이 이토록 우리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는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다. 이 소설을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1891년생 윌리엄 스토너는 미국 중서부 어느 시골 가난한 농가의 외동아들로 자랐다. 그의 부모는 평생 땅에 발붙이고 산 농부의 삶을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윌리엄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는 농사짓는 부모에게 미력하나마 힘을 보탰다. 착한 아들이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윌리엄 스토너의 일상은 또래 도시 청년들이 품었음직한 거대한 이상이나 야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도 하나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농사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느 저녁, 아버지가 윌리엄에게 농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낸 것이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군청 직원이 찾아와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수확이 가능하다며 아들의 진학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윌리엄의 아버지에게는 그게 제법 일리 있는 말로 들렸던 모양이다. 


열아홉 살의 윌리엄 스토너는 미주리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먼 친척의 집에 기숙하며 부모가 보내주는 푼돈에다가 친척 집의 농사일과 허드렛일을 거들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다. 윌리엄은 평범하고 성실한 농과대학 학생이었다. 


그런 그의 삶에 균열이 생겼다. 2학년 2학기에 우연히 교양수업으로 듣게 된 영문학개론이 시발점이었다. 같은 학교 영문과의 괴짜로 통하던 아처 슬론 교수의 수업에서 윌리엄 스토너는 문학에 대한 달뜬 열정의 특이한 면모를 엿보았던 것이다. 그는 문학의 무엇이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궁금했다. 물음표는 곧 문학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으로 대체되었다. 대지의 숨결로는 차오르지 않던 어떤 삶의 희열이 문학을 통해 윌리엄의 내면에서 충만해져 갔던 것이다. 아처 슬론은 그의 이 풋풋한 열정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괴짜 교수로부터 영문학자의 길을 권유받은 그는 인생 방향을 틀기로 결심했다. 그 결정이 부모의 기대에 대한 배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윌리엄은 자신의 운명을 비껴갈 수 없었다. 부모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자신들이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그것으로도 충당이 안 되면 사람을 빌려 쓰면 된다고 그의 아버지는 말했다. 이 무미건조한 언어 속에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숨어있음을 윌리엄 스토너는 감지했을 것이다.


스물일곱 살에 그는 미주리대학교 영문과 전임강사 자리를 얻었다. 그리고 어느 날 대학교수 모임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첫눈에 반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 결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윌리엄 스토너는 자신의 결혼이 실패했음을 감지했다. 이 받아들일 수 없는 열패감을 극복하려고 두 남녀는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 시기가 둘 사이에 정념이 타오른 유일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예쁜 딸 그레이스가 태어났다. 그 후 둘 사이는 다시 멀어졌다.


영문학자로서 윌리엄 스토너의 야심은 작지 않았다. 학문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하지만 아내와의 불화는 그의 학문 정진에 안 좋은 영향을 끼쳤다. 게다가 동료 교수 홀리스 로맥스와의 은근한 신경전은 그를 지치게 했다. 그러다가 로맥스가 아끼는 한 제자의 학업 평가를 둘러싸고 두 교수 사이에 격렬한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은 영문과를 넘어 대학 내 이슈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윌리엄 스토너는 패배했다. 어쩌면 그의 만사가 그러한 듯 보였다.


1956년 예순다섯의 나이에 그는 죽었다. 사인은 암이었다. 죽은 후에도 그를 특별히 기억해 주는 동료나 제자는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윌리엄 스토너라는 한 인물의 생애를 조망해 보았을 때, 우리는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이 이 지구상에 한 시절 머물다 갔음을 느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통쾌함이라고는 일절 찾아보기 힘든 이 ‘고구마 전개’의 팍팍한 이야기를 21세기의 세계 독자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쉽다. 윌리엄 스토너가 걸어간 삶의 궤적 어느 구석엔가 우리의 흔적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을 책을 읽다가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놀란다. 


윌리엄 스토너는 소설 속의 한 인간이면서 또한 우리 모두이기도 한 것이다. 그 개별성과 보편성이 마구 교차하면서 우리의 심장 저 어두운 심연을 뒤흔든다. 그의 패배는 우리가 겪었던 어떤 실패담이기도 한 것이며, 그가 잠시 달뜬 마음으로 빠져들었던 열정의 시간은 우리 모두를 어느 시절 스쳐 간 훈풍을 닮았다. 그 먹먹한 공감의 여운이 책장을 덮고도 꽤 오랜 시간 우리의 영혼 속 볕 들지 않은 곳에서 맴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윌리엄 스토너인 것이다. 이 평범함의 서사와 인고의 미학이 사실 우리가 매일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고갱이임을, 우리 모두 어렴풋이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