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덤하게 묻혀버린 옛 추억들이 초겨울 바람에 쓸려 예고 없이 드러나는 때가 있다. 그러면 ‘사무친다’는 말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절절히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깊이 잠들어 있던 예민한 감각들이 되살아나 내 심장을 찌르고, 그 아픈 상처를 나는 오롯이 받아들인다. 조금은 감상적이어도 내 자신이 용납되는, 그러니까 겨울의 초입은 나에게 ‘통속의 계절’인 셈이다.
조금 감상적인 책을 펴들고 싶었다. 굵직한 메시지가 없어도 좋다. 그냥 이 계절의 풍경 속으로 나를 거침없이 밀어 넣어만 다오! 그런데 그런 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릴없이 책 주변을 배회했을 뿐, 그 안으로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게 방황의 시공간에서 헤매고 있을 때, 소설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두툼한 두 권의 책으로 번역된, 2천 년 전 로마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소설책이 내 서늘한 계절의 감성을 매만져줄 수 있을까? 설마…. 별 기대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내 마음에 파도가 일었다. 나는 이내 2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주인공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폴란드의 역사소설가 헨릭 시엔키에비츠에게 1905년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긴 장편소설 <쿠오 바디스 Quo Vadis>가 바로 그것이다.
라틴어 “Quo Vadis, Domine(쿠오 바디스 도미네)”는 우리말로 하면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우리에게는 사실 할리우드 고전영화로 더 친숙한 제목이 바로 <쿠오 바디스>다. 러닝타임 5시간이 넘는 이 대작 영화 또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쿠오 바디스>는 한국어 번역본으로 약 1천 페이지 가까이 되는 꽤 방대한 분량이다. 좀 빤한 추측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면 왠지 쉬운 독서를 허락하지 않을 듯한 꼿꼿함을 의심해 볼만하다. 더군다나 시대 배경이 오랜 과거에 뿌리를 대고 있다. 헨릭 시엔키에비츠라는 작가의 이름도 낯설기는 매한가지. 이쯤 되면 큰 각오를 품지 않고서 이 책을 집어 들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소설을 뜬금없이 읽게 되었을까. 책을 다 읽고 난 이 순간에도 뚜렷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 소설이 어느 날 불쑥 내 곁에 다가왔다고….
이야기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폭군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를 배경으로, 사도 바오로와 베드로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룬다. 그 비극의 대서사시를 끌고 가는 또 하나의 축에는 로마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와 아름다운 이방 처녀 리기아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문체는 평이하면서도 그 시대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만만찮은 분량임에도 책이 술술 읽히는 이유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면모도 입체적이어서 좋다. 고대 로마의 정신에 파고드는 당대 신흥 종교 기독교의 거센 물결. 이 격랑 속에서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는 여러 군상이 각자 입장에서 치열하게 충돌한다. 그게 야망이건 음모건 무모한 권력욕이건, 혹은 사랑이건.
이야기는 어느 귀족 저택 안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한 여인에 대한 로마 귀족 청년 비니키우스의 달뜬 열정으로 시작한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직진하는 비니키우스와, 그의 사랑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이방 처녀 리기아 사이의 밀당.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고, 또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영락없는 통속 문학의 외피인 <쿠오 바디스>는, 그러나 뒤로 가면서 점점 새로운 색깔을 띠기 시작한다.
작품의 후반부는 로마 황제 네로의 기독교도 박해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자신의 시적(詩的) 영감을 위해 로마에 대화재를 일으킨 네로의 광기. 그 미친 짓의 결과를 무마하기 위해 황제와 그의 간신 무리 일부가 무고한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데, 이 비극의 역사에 리기아와 비니키우스의 사랑도 휩쓸려 간다. 원형경기장에서는 학살이 벌어지고 로마 시민들은 피의 카니발에 열광한다. 네로의 광기는 그렇게 로마 시민들에게까지 급격히 번져간 것이다.
가장 극적인 부분은 차분히 죽음을 맞이하는 기독교인들의 성스러운 태도다. 네로의 발광과 대조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죄 없이 당해야 하는 무고한 죽음이다. 하지만 실존적인 고뇌까지 껴안으면서 그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는다. 이 장엄한 스펙터클에는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리고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사도 베드로의 순교로 향한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쿠오 바디스>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니키우스와 리기아가 펼치는 인간의 사랑이 꽃망울이라면, 소설이 향해가는 종착점은 초기 기독교인들과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거대한 꽃밭으로 틔우고자 했던 ‘인류의 사랑’, 즉 박애다. 그렇게 사랑의 의미를 새롭게 곱씹어볼 수 있는 변곡점이 이 소설에는 존재한다.
‘그들’의 시간으로부터 우리는 2천 년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세계사에 기독교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해 오고 있는지를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인류 문명의 역사는 기독교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 참혹한 박해의 고통 속에서 피를 흩뿌리며 초창기 기독교인들이 남기고자 했던 사랑의 증표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은 온전히 잘 보전해 가고 있는 것일까? 포용보다는 배타에, 사랑보다는 응징에 방점을 찍으며 신의 교리를 설파했다가 사도 베드로에게 호통 들었던 소설 속 어느 사도의 왜곡된 신심이 지금 우리 사회의 십자가 아래에서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통속의 계절에 우연히 펼치게 된 이야기에서 나는 문득 사랑의 ‘진짜 의미’를 되새겨 본다. 사랑, 그 오래된 무거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