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는 책   2024.9월호

무대 위 희곡


서점의 문학 코너에 갔다고 상상해 보자. 대부분이 소설집과 시집이다. 희곡집은 셰익스피어, 괴테, 베케트, 체호프 등의 세계 문학 전집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즘 나온 희곡집들은 저기 저 구석에 있다. 한때 세계의 문학사를 이끌었으나 어쩐지 현재는 변방에 있는 희곡. 문학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에게도 희곡집은 후순위인 것이 현실이다. 왜 사람들은 희곡을 안 읽을까? 희곡은 무대가 있어야 완성되는 문학이 아니다. 활자로, 그 자체로만 읽어도 좋다. 소설이나 수필처럼 배경 설명이 친절하진 않지만, 그만큼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등장인물 간의 숨 막히는 티키타카를 읽어내는 것도 희곡만의 매력이다. 


9월의 권하는 책에서는 원로 극작가부터 요즘 작가들까지 다양한 세대의 희곡집을 소개한다. 최근 전북 지역에서 공연된 희곡이 포함된 작품집도 여럿 소개하니, 연극을 본 사람이라면 희곡까지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희곡을 읽는 즐거움을 느껴보자. 연극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이강백 희곡전집 1~9  

이강백 | 평민사 | 20194


원로 극작가 이강백의 희곡전집이다. 1971년부터 2021년까지 50년간 써온 47편의 희곡이 담겨 있다. <결혼>이나 <파수꾼>처럼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배웠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가는 작품들을 무대에 올릴 때의 극단, 배우, 연출, 그들의 연기는 어땠는가, 비평가들의 평은 어땠는가, 관객의 반응들은 어땠는가 하는 것들을 세세하게 머리글에 적어 놓았다. 마지막 희곡집인 9권에는 2015년부터 2021년까지의 작품들이 묶여있는데, 이중 <어둠상자>는 전주시립극단이 올해 4월 공연한 바 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이은용 | 제철소 | 2023


이은용 극작가가 세상에 남긴 다섯 편의 희곡을 엮었다. "나는 여기 있다. 하지만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 내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트렌스젠더 당사자인 작가는 이 희곡집에 여러 성 성체성과 그에 따른 사회적인 인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표제작 <우리는 농담이(아니)야>는 여섯 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장막희곡이다. 존재가 부정되거나 농담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세상을 마주 볼 수 있다. 202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상을 받았다. 







관객모독

페터 한트케 | 민음사 | 2012


원서는 1966년도에 나온 희곡집으로 희곡 역사에서 가장 도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관객모독>은 페터 한트케의 초기 희곡으로 전통극 형식에 대항하며 초연 당시 연극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무대 위 등장인물은 배우 넷이 전부이고, 극을 이끄는 특별한 줄거리나 사건은 없다. 배우들은 연기를 한다기 보다는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건다. 급기야 '너희들'이라고 부르며 관객들을 조롱하고 모독한다.  








보도지침 

오세혁 | 걷는사람 | 2024


다섯 작품이 실려있는 오세혁 극작가의 희곡집. 1986년 제5공화국 시절 한국일보 기자가 정부의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건을 풀어낸 <보도지침>,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인 파울 요세프 괴벨스의 이야기를 담아낸 정치풍자극 <괴벨스 극장>, 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때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처형당한 여수의 14연대 부대원들을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지상 최후의 농담>등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재조명하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부조리함을 되짚는다.






여자는 울지 않는다

이보람, 이연주, 이오진, 신효진 | 제철소 | 2019


현재 대학로에서 주목받는 여성 극작가들의 희곡을 모은 작품집이다. 여성 인물을 대상화하거나 스테레오 타입으로 보여주는 기존 연극들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언어로 입체적인 여성의 삶을 그려낸다. <여자는 울지 않는다>의 이보람, <전화벨이 울린다>의 이연주, <개인의 책임>의 이오진, <밤에 먹는 무화과>의 신효진까지. 감정 조절에 실패하는 콜센터 직원의 이야기인 <전화벨이 울린다>는 작년 여름 전주 극단 '창작극회'가 무대에 올리기도 했었다.






벚꽃 동산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 열린책들 | 2009


체호프의 희곡 여섯 작품이 모여있는 희곡집. 체호프의 연보와 옮긴이의 해설 논문이 함께 있어 이해를 돕고 있다. 원서는 1903년에 나온 것으로, 우스꽝스럽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등장인물들이 웃음을 준다. 표제작 <벚꽃 동산>은 올해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연출을 맡은 사이먼 스톤은 인터뷰에서 고전을 현대로 옮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전으로 부르는 작품들도 그 당시에는 동시대적인 작품이었다."라고. 고전으로의 귀환, 삶이 힘든 현대인들에게 어떤 힌트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