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2024.5월호

동물원이 사라져야 하는 이유



김나연
 동물권행동 카라’ 활동가


에버랜드에서 지내던 자이언트 판다 ‘푸바오’가 중국의 동물원으로 떠났다. 지난해에는 얼룩말 ‘세로’가, 최근에는 타조 ‘타돌이’가 동물원을 탈출했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보인다고 해서 갈비뼈 사자라고 불리던 ‘바람이’의 열악한 사육환경이 보도되면서 바람이는 청주동물원으로 구조되기도 했다. 이 동물들의 이야기는 모두 동물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동물원에 살고 있는 동물들, 그들이 겪은 사건들, 각 개체의 삶의 서사를 보며 사랑스러움, 연민, 경이로움을 느낀다. 다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대부분 동물들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동물들은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인공적으로 설계된 공간에 갇힌 채 그 삶을 관람객과 구독자, 팔로워들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삶을 산다. 


사육곰을 구조해 돌보는 동물단체 ‘곰 보금자리 프로젝트’에서는 <에버랜드 푸바오 열풍으로 번 돈을 동물에게 돌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보전’을 핑계 삼아 동물의 번식을 반복하면서도, 동물의 복지에는 투자를 아끼는 에버랜드에 시설 개선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거의 국가적 단위로 사랑을 받았던 판다 ‘푸바오’조차 관람객이 내는 소음에 고통스러워하거나, 방사장의 부족으로 검역 기간 내내 지하 내실에만 머물러야 했다. 푸바오조차 이런 상황인데, 영세한 동물원의 존재감 없는 동물들이 겪어야 하는 삶은 말할 것도 없다. 동물원의 동물들은 생각보다 매우 자주 죽고, 폐기된다.


1906년 미국 뉴욕 브롱크스동물원에는 ‘인간’이 전시된 적이 있다. 벨기에가 사회, 문화, 기술의 발전을 과시하는 만국박람회를 열면서 식민지 콩고민주공화국의 주민을 전시한 것이다. 콩고의 어른, 어린이, 남녀 할 것 없이 콩고인들은 전통 복장을 한 채 전시됐다. 관람객은 유럽 백인들이었다. 백인들은 콩고인들을 구경하며 울타리 너머로 바나나를 던지기도 했다. 콩고인들은 만국박람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동물원에 종종 전시됐다. 


21세기의 윤리에 따르면 인종이 다른 누군가를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삼는 것은 무척 미개하고 수준 낮은 행동이다. 이제는 공공연하게 다른 인종을 전시하는 동물원은 없다. 동물원에는 ‘비인간동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극곰, 판다, 기린, 사자, 미어캣 같이 삶을 전시당하는 동물들이. 언젠가 어릴 적의 나도 동물원이나 수족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목을 높이 들어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기린의 위엄, 유려하게 헤엄치는 벨루가의 아름다움은 경이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동물들의 고통을 안다. 불과 지난 2월에도 거제의 한 아쿠아리움에서 공연하던 쇼돌고래 두 마리가 죽었다. 1월에는 김해시의 폐쇄된 동물원에 남아있던 백호도 죽었다. 나는 이제 많은 동물들이 삶을 박탈당한 채 살다가 죽는 것을 알고, 그 죽음은 사람들의 돈벌이를 위해 묵인된다는 것을 안다. 이제 내게 동물원은 야만적인 감옥과 다름없다.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동물들은 지능이 낮으니 동물원에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라는 질문을 듣는다. 하지만 지능은 어떤 능력을 재단하는 척도다. 동물들에게 종이 다른 인간의 척도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비인간동물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인지와 사고의 능력이 있다. 또한 인간과 비슷하게 가족이나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다른 종에게 연민을 느끼고 돕는 행동도 한다. 동물들도 알고, 깨닫고, 느낀다. ‘지각력’이라 부르는 힘이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원 동물들이 겪는 사정은 만국박람회의 콩고인들의 사정과 다를 수 없다.


태국 치앙마이에 위치한 ‘코끼리 자연 공원(Elephant Nature Park, 이하 ENP)’에 방문한 적이 있다. ENP는 관광 산업으로 학대당한 코끼리들의 영원한 안식처다. 구조된 동물들을 최대한 야생에 가까운 자연환경에서 보살피며, 타고난 본성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이런 공간을 ‘생추어리’라고 부른다. ENP의 코끼리들은 구조 후에 적절한 치료를 받은 후, 코끼리 무리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쳐 ‘코끼리처럼’ 살아간다. 드넓은 대지 위에서 걷고, 강을 건너고, 진흙 목욕을 하고, 바나나 같은 과일을 벗겨먹으며 산다. 완전한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먹이 급여나 치료는 인간에게 기대야 하지만, 코끼리들은 나름의 질서와 자유 속에 활력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틀을 머물렀던 봉사자였다. ENP에 머무르기 위해 비용을 냈고, 코끼리용 밥을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사실 말이 봉사자이지 거의 관광객과 다름없었다. 이틀간의 봉사 프로그램은 대부분 생추어리를 돌아다니며 코끼리를 만나는 일이었다. 가이드는 이 코끼리가 누구이고, 어디서 구조됐고, 어떤 코끼리와 친하며, 어떤 식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곳에서 코끼리들은 모두 다 개별적이며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코끼리에게 아주 가까이 가거나 만지는 일은 하지 않았다.


ENP는 나와 같은 봉사자들이 내는 비용으로 운영됐는데, ENP의 설립자인 쿤 렉은 동물단체로서 더 많은 코끼리를 구조하고 돌보기 위해 봉사자들을 생추어리로 초대하며 비용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ENP의 목표와 환경, 코끼리를 책임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동물을 ‘보존’하고 ‘연구’하겠다는 국내 동물원들이 얼마나 부족하고 얄팍한지 생각하게 된다. 서식지가 파괴된 동물들이나 동물원에서 태어난 동물들은 가능한 생추어리로 보내 여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인도적인 책임이다. 그리고 ‘스타 동물’로 돈을 많이 번 동물원이라면, 그 수익의 많은 부분은 의무적으로 동물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써야 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동물들이 생추어리나 야생으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동물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동물원은 사라져야 한다. 야생동물들은 그들이 태어난 곳에 있어야 한다. 동물이 보고 싶다면, 인간이 그 서식지로 가서 아주 멀찌감치 떨어져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게 맞다. 야생동물을 보거나 만나고 싶다는 발상 자체가 욕심이라는 걸, 그 욕심이 지금의 동물원의 수요와 공급을 만들었다는 걸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나연  

제주도에서 돌고래 무리가 헤엄치는 것을 보고 동물의 권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동물이 착취되지 않고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며 활동하고 있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는 이유』에 공동 집필 작가로 참여, 여러 매체에 관련 글을 기고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