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이 지배하던 80년대, 문화대통령이 짧게 집권했던 90년대 중반을 거쳐 21세기를 향해 가던 세기말의 음악 시장은 그야말로 대격변을 맞이하고 있었다. 문화대통령이 시장의 연령대를 낮춘 덕에 시장은 매우 넓어졌고, 그의 이른 은퇴는 너무나도 큰 부재를 남겼다. 내가 음악을 무지성으로 섭취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이쯤부터였다. 너바나(Nirvana)의 커트 코베인이 삶을 던져가며 자신의 ‘진정성’을 모두에게 증명한 지 5년도 안 된 그때, 문화대통령의 빈자리는 H.O.T,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세대 아이돌들의 난립으로 채워졌다. 커트 코베인의 망령에 이제 막 홀리기 시작한 중2병 어린이였던 나에게 이런 상황은 당연히 못마땅했다.
그때만 해도 여기저기서 진정성 운운하며 진짜 음악과 가짜 음악을 나눠 서로 싸우고들 있었다. ‘작곡도 못 하고, 가사 한 구절 쓰지도 못하는 게 무슨 가수냐’, ‘립싱크나 하는 게 무슨 가수냐’ 따위의 말들로 당시 아이돌을 폄하하는 이들과 ‘우리 오빠도 곡 쓴다’ 혹은 ‘그게 뭐 중요하냐’고 쉴드를 치는 이들이 설왕설래를 벌였다. 21세기가 24년이나 흐른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무의미한 논쟁이었다. ‘그게 뭐 중요하냐’로 정리된 이 촌스러운 논쟁의 결말을 보면, 이수만 전 SM 회장의 혜안이 정말 대단했다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는 진정성 따위가 아닌, 예술적 가치를 따지는 고상한 음악이 아닌, 오로지 상업적 가치를 지닌 상품을 최우선으로 고민했다. 장인의 손길로 만들어지는 건 세상에 하나뿐인 명품이겠지만 그것은 전방위적인 히트 상품일 순 없다. 히트 상품은 컨베이어 벨트가 즐비한 공장을 통해 대량으로 제조된다. 그는 히트 상품을 위한 일종의 가수 공장을 세웠다.
그의 제작 커리어 초반은 분명 달랐다. 현진영, 한동준, 유영진 등 기성 및 신인 가수의 음반 제작 및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며 하는 일종의 아티스트 케어에 가까웠다. 보통의 기획사는 콘텐츠의 제작 과정에서 아티스트의 자의식은 최대한 존중하되, 유통이나 프로모션 과정에 관여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업무가 이루어진다. 현진영의 마약 파동 등 다루기 힘든 아티스트들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을까. 이후엔 발굴 및 트레이닝부터 의상, 컨셉, 음악 등 모든 부분이 자신의 관리감독 아래 만들어지는 아이돌 제작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자의식이 강한 아티스트에 대한 ‘케어’, 혹은 머리가 아직 크지 않아 통제 가능한 연습생들에 대한 ‘관리, 감독’. 사업 리스크라는 관점에서 보면 후자가 훨씬 안전해 보이는 게 자명한 사실이다.
SM 사단이 보다 견고해질수록 제작 공정은 더 세밀하게 분업화되어 현재는 노래 하나에 저작권자가 10명이 족히 넘어가는 데까지 이르렀다. 제작자의 지시 아래 작곡가, 작사가, 각종 아트 디렉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분업화를 통해 당연히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절감되지만, 이 과정에서 가수의 자의식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그 빈자리는 제작자의 감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판타지’가 대체한다.
인간의 이성이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 믿는 현대인들은 부정하겠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 소위 아티스트의 ‘진정성’, 흔히 말하는 ‘자의식’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는 과정에 파열음을 만들고 방해가 될 따름이다. 20대 중반을 넘어가는 아이돌의 연애 소식에 많은 이들이 분개하는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화는 그저 지나친 과몰입으로 인한 어긋난 애정이 아니다. 아이돌의 ‘자의식’이 초래한 ‘연애’라는 결과가 나의 ‘감상’에 찬물을 끼얹었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수만 전 회장은 이미 30년 전부터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티스트 개인의 고상한 사상과 세계관이 아닌, 감정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판타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화대통령이 던진 ‘환상 속의 그대’라는 화두는 이수만의 SM과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제작자들이 조성한 K-Pop 산업단지에서 만들어진 ‘말하는 예쁜 인형’들로 완성됐다. 그리고 그들이 제공하는 ‘판타지’는 전 세계를 점령해 냈다.
K-Pop의 성공요인을 정리해 보자면, 가수의 ‘자의식’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식의 리스크 관리, 뛰어난 제작자의 감으로 만들어진 ‘판타지’ 제공 정도로 볼 수 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뛰어난 감각과 관리 노하우를 가진 제작자 그 자체인 것이다. 수조 원의 가치에 달하는 거대 기업이 기술적 혁신이나 경영 철학이 아닌 누군가의 감에 의해 좌우된다.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어도 SK하이닉스는 멀쩡히 굴러가고, 이재용 회장이 구속되어도 갤럭시는 잘만 팔린다. 이에 비해 SM에서 이수만 전 회장이 밀려나는 과정,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의 분쟁은 그동안 가려져 있던 K-Pop 시장의 기이한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이 사실 가장 큰 리스크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통제를 벗어난 아이돌의 일탈은 일시적인 불매운동이나 잠정적 활동 중단, 멤버 교체 정도의 수준에서 마무리 되지만, 제작자의 헛발질은 한순간에 수천억에 이르는 돈을 증발시킨다. 연애하고 싶은 아이돌과 고상하신 프로듀서 선생님 중 과연 누가 더 큰 리스크인가.
계약이 마무리된 아이돌 그룹들은 보통 해체하거나 다른 곳에 새 둥지를 튼다. 전자와 후자 모두 자의식 없이 어떤 상품의 부품이 되기를 거부한다. 전자는 ‘자의식’을 가진 개인으로 돌아가고, 후자의 경우 더 이상 ’통제’, ‘관리’, ‘감독’의 대상이 아닌, 세심하게 ‘케어’받는 아티스트이고 싶은 것이다. 전, 현직 아이돌 모두의 자의식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삶을 응원한다. 대형 기획사들은 어서 빨리 자기네 대표님이 가장 큰 리스크임을 깨닫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라. 그리고 소속 아이돌에게는 연애할 자유를 허하고, 조속히 안 걸리고 연애할 방안을 마련하라.
김내현
2013년 데뷔한 밴드 로큰롤라디오의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 현재 다수의 매체를 통해 음악 및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