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공간들이 전국 방방곡곡 생겨나고 있다. 대형 카페인가 싶어 들어갔다가 우연히 미술 전시나 음악 공연을 맞닥뜨리기도 하고, 세련된 감각이 엿보이는 정원이 펼쳐지기도 한다. 한켠에서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브랜드 상품들을 모아놓은 편집샵을 발견하는 일은 놀랍지도 않다. 우리는 이런 장소들을 흔히 ‘복합문화공간'이라 부른다.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여러 가지 문화가 합쳐져 있는 공간'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레스토랑이라고 하기에도, 미술관이라 하기에도, 쇼핑몰이라 부르기에도 애매한 곳들. 이런 ‘애매한 공간'들에 모두 복합문화공간이란 이름이 붙여진듯한 요즘이다.
복합문화공간은 쇼핑몰에 식음료 매장 뿐만 아니라 영화관이나 전시관 등 여타 문화시설이 함께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반대로 순수예술 전시만으로는 지속가능한 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콘텐츠를 도입한 사례들도 있다. 어떤 경우든 방문객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화적 요소와 돈이 벌리는 상업적인 요소가 합쳐졌다는 것이 복합문화공간의 핵심이다.
최근 들어 복합문화공간이 크게 성행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는 유휴공간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도시가 오래되고 성장과 확장을 거듭하면서 본래의 기능을 다한 공장이나 발전소, 쓰레기소각장 따위의 산업시설들을 목격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낡았으면서도 화려했던 과거의 아우라가 빛바랜 듯 남아 있는 폐산업공간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곳들은 적절히 리모델링돼 핫플레이스로 성공했고, 그러자 폐산업시설을 철거해 없애기 보다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오래된 산업공간들은 대개 규모가 크고 뻥 뚫린 실내구조를 갖고 있어 한 가지 용도만으로 채우기 힘든 규모와 형태가 많다. 뒤집어 생각하면 보다 다채로운 콘텐츠를 품을 잠재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이런 추세에 부응하듯 유휴공간 재생에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문화와 상업이 합쳐진 각양각색의 복합문화공간이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이다.
부산에 F1963이란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고려제강의 와이어공장이었던 이곳은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사용된 후 공연장, 카페, 도서관, 그외 각종 F&B 매장들로 채워졌다. 이 과정에서 부산시와 협약을 맺은 것이 주요했다. 그런 한편 고려제강이 가진 브랜드파워는 ‘현대모터스튜디오’와 ‘금난새 뮤직센터’란 실험적 공간을 유치하는 원동력이 됐다. 다른 복합문화공간과의 차별성을 만들어내면서 부산 시민들에게 이례적인 문화 예술 경험을 선사하게 된 것이다.
복합문화공간 전성시대를 연 또 다른 주역은 바로 ‘크리에이터’들이다. 자기만의 소신과 철학이 뚜렷하고 그것을 창의적인 방법으로 실현해내는, 단지 예술가라든가 창업가 혹은 그 비슷한 어떤 이름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공간 또한 한 가지 목적만을 갖지 않는다. 일단 크리에이터들은 기성 문화에 적당히 타협해 끼워 맞춰지기를 거부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 이상을 풀어놓은 공간은 얼마나 신박하고 변화무쌍할까.
강원도 고성에서 수제버거로 유명해진 ‘이스트사이드바이브클럽'은 이름과 달리 클럽도 아니고 햄버거 가게도 아니다. 게다가 주인장은 패션 디자이너로, ‘이사바'는 복합문화공간이라 주장한다. 2019년 고성에 큰 산불이 났을 때 불에 타 폐허로 방치돼 있던 펜션 건물을 인수해 직접 가꿔낸 공간이다.
양양에서 시작된 서핑 붐은 동해안 도시들을 재발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핫플레이스 동네들이 그렇듯 젠트리피케이션과 지나친 대형화, 상업화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고 있다. 이사바는 여기에 작은 전환점을 만들기로 했다. 주민들을 초대해 식사 대접을 하고, 동해안을 찾는 또 다른 크리에이터들과 소통하며 도움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공간이 문화를 만들고, 문화가 지역에 스며들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사바의 도전은 성공적으로 진행 중이며 지금은 고성군과 협력해 제2의 이사바를 오픈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복합문화공간의 핵심이 문화와 상업의 결합이라면, 그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공간을 기획하는 이다. 좋은 공간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혼자만의 실험은 한계가 있다. 성공한 복합문화공간은 그 ‘복합'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지자체든, 주민이든, 다른 기업 혹은 크리에이터든 상생할 수 있는 지점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협업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그저 유행하는 것들을 잔뜩 모아두거나 반대로 너무 비워두기만 해서는 ‘복합'으로부터 피어나오는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다. 문화는 공유될 수 있어야 하고 상업에도 철학이 필요하다. 복합문화공간이 가진 ‘애매함'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바꾸는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지나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에서 학사를 마치고,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학위, 협동과정 조경학 과정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전문위원으로 있으며, 다수의 문화예술 프로젝트와 연구에 참여. 도시문화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며 저서 『문화로 도시읽기』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