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로서의 등단
‘등단(登壇)’을 한자로 풀면 ‘단에 오르다’라는 뜻으로, 평지보다 약간 높은 자리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의미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가 ‘교단’에 오르는 것, 연설을 시작하려는 강연자가 ‘연단’에 오르는 것 등이 여기 속한다. 그럼 시나 소설을 써서 작가로 불리게 된 사람에게 ‘등단’은 무엇을 말할까? 알다시피, 시인이나 소설가가 글을 쓸 때 타인의 눈길을 끄는 높은 장소에 올라가는 일은 없다. 문학장에서 등단은 실제적 행위라기보다 상징적 입사 의식을 가리킨다. 즉, 해당 문학 장르에서 작가적 재능을 지녔음을 공인받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 일반이 그렇듯, 문학에서도 재능이란 다분히 주관적 평가의 대상이기도 하다. 넘치는 재능은 곧장 눈에 띄는 법이지만 어떤 재능은 그것을 알아보는 조건에 따라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고흐만 해도 평생 한 편의 그림만을 팔았다는데, 그가 재능 없는 화가라는 말은 누구도 할 수 없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등단은 모호한 기준일 수밖에 없다.
등단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제도이기 때문이다. 등단은 문학적 명성을 나누는 사회적 인증 절차이자 돈이 오가는 시장의 법칙을 따른다. 이는 한국에서 등단의 역사를 살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서구식 근대문학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유입되었다. 고소설이나 한시, 시조, 가사 등 문학의 전통적 양식을 벗어나 서양에서 글을 쓰고 유통하는 방식이 식민지 시대를 전후하여 도입된 것이다. 1910년대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는 이미 현상문예를 통해 독자 투고를 받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신춘문예’는 1925년 『동아일보』를 출발점으로 본다. 뒤이어 『조선일보』 등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들이 신춘문예를 실시하여 여러 장르에 걸쳐 창작작품을 공모했다. 이후 추천제가 오랫동안 활용되기도 했고, 1990년대 이래로 문예지 중심의 신인상이 등단제도에 도입되기도 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신문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던 초기의 신춘문예는 새로운 작가를 육성하여 문학에 새 바람을 일으키자는 식의 문학 발전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문맹률도 높고 독자층도 두텁지 않던 근대 초기, 유일한 공론의 장으로 기능했던 신문은 더 많은 읽을거리를 통해 더 많은 독자를 끌어모아야 했다. 상품으로서의 신문이 갖는 가치를 증대시켜야 했고, 그 방편의 하나가 신춘문예였던 것이다. 등단이 문학적 기량의 증진이나 인재 발굴보다 시장의 원칙에 발맞추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문예지의 경우에도 출판사와 연계된 작가의 발굴이 강조되면서 시장과의 연계를 분리해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한국 문학의 폭과 깊이가 확보되고 창작에 관한 관심과 동경이 높아지면서 우리가 아는 등단의 의미가 뚜렷해진 것도 사실이다. 작가의 등단 경력은 그 작가의 식견과 안목을 보증하는 표식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요 몇 년간 등단제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집중되었던 이유는, 그것이 ‘문단’이라는 작가들의 집합이나 그와 연관된 일부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문학
앞서 등단이 상징적 의식이라 말했는데, 경제학 용어를 빌리면 등단은 잉여가치를 산출한다. 당연하게도, 등단하지 않은 채 시를 쓴다고 시인이 아닐 리는 없다. 개인 블로그에 매일 콩트 한 편씩 써서 올리는 사람을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할 근거도 없다. 관건은 누군가에게 고료를 전제로 글을 청탁하여 공적 공간(지면이나 인터넷 등)에 게시함으로써 다시금 그에게 청탁이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순환 관계에 있다. 등단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런 기회는 상당히 드물며 그와 연관된 활동, 가령 강연이나 강의, 인터뷰 등의 기회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능력과 자격을 갖춘 작가에게 그런 기회가 돌아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문학장의 입사의식이 ‘명성’이라는 공인 시스템과 ‘청탁’이라는 시장 메커니즘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한, 평가의 공정성과 기회의 균등성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직면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문학 등단제도가 비판받았던 사태의 핵심이 여기 있다.
지금 상황은 어떤가? 많은 논쟁이 오가고 등단을 둘러싼 사회 공론이 형성되었으며, 그와 연관된 신문과 문예지 등에서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심사 주체의 공정성을 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고, 등단제도 자체를 열어두거나 심지어 폐지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는 이전의 체제를 유지한 채, 보수와 보완을 통해 등단제도를 이어가는 형편이다. 일부 문예지는 등단 여부와 무관히 투고 형식으로 원고를 모집하거나 추천을 받기도 했다. 등단 절차의 공정성 시비를 벗어나려는 적극적 시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투고 받은 글의 게재 여부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 게재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주체는 어떤 자격이나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릴 것인가? 추천 역시 문제가 없지 않은데, 이 또한 문학성에 관한 판단이며 등단제도를 통해 실행되던 형식 아니던가? 더욱이 누가 추천할 자격을 갖는가를 묻게 될 때, 결국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문제는 누군가는 제출된 원고에 대한 옳고 그름, 등단과 탈락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단제도의 편파성이나 무용성을 문제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그 평가가 이뤄지는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당선 발표에는 으레 심사평이 붙어있고, 어떤 이유로 당선과 탈락이 엇갈렸는지 설명이 붙지만, 요식행위인 경우가 다반사이다. 불공정성이나 편파성이 제기되는 것도 당선/탈락 이유가 납득되지 않기보다, 솔직하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객관과 공정이 지상의 가치로 추구되는 우리의 시대는 문학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 따라서 객관과 공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이해하면서도, 문학의 가치는 결코 객관성이나 공정성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임을 밝혀야겠다. 문제는 등단이라는 제도와 예술로서의 문학이 갖는 간극에 있다. 판단의 딜레마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판단
이런 사정은 등단제도에 관한 사회적 공론, 시시비비가 사라질 수 없음을 시사한다. 다른 모든 예술과 비슷하게 문학 역시 문학만의 특수한 가치 평가의 무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판단하는 개인마다 생각과 감각이 서로 다르며, 이는 어떤 작품의 문학적 성취에 대해 상이한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원고를 공적으로 출판하거나 게시함으로써 명성과 청탁의 잉여가치를 낳는 순환이 겹쳐 있기에 등단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복잡한 것이다. 등단제도를 옹호하거나 부정하는, 이분법에 얽매여서는 곤란하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판단하는 사람, 모두 인간으로서 각자의 편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작가의 노력과 활동에 따라 각자 상이한 잉여가치를 향유할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적어도 등단에 관련해서는 어떤 작품을 문학적이라 인정할 때 필요한 근거를 분명히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입장의 분명함이며, 관점과 방향의 일관성을 표명하는 것이다.
창작은 ‘감’에 따른다 해도, 그에 대한 가치 평가마저 ‘감’에 의존할 때는 논란을 피할 수 없다. 완전한 객관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설득의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문학성 판단의 주체들, 예컨대 작가와 비평가, 문예지나 신문 등은 저마다 신념하는 가치관과 지향점이 다르기에 다양한 문학적 입장을 내보일 수밖에 없다. 저마다 추구하는 문학적 가치를 정확히 제시하고 이에 따라 판단할 것을 공언한다면, 그에 동의하거나 수렴하는 작품이 모여들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문학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그저 상품이 되고 말 때 문학은 작가나 작품이나 고유한 관점과 태도를 잃고 ‘물건’의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시장에서는 객관적 가치(가격) 평가와 공정한 거래가 중요하지만, 문학은 그와 다르다. 더 낫거나 훌륭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가와 교환의 척도가 같지 않다는 뜻이다. 상품의 미덕은 동일한 것이 반복될 때 있지만, 작품의 미덕은 항상 다를 때 생겨나기 때문이다. 객관과 공정은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기준이지만, 적어도 문학에 대해서는 유보적일 필요가 있다.
이쪽도 저쪽도 모두 옳고, 양편 다 아름답다는 것으로는 특정한 작가나 작품을 선별할 수 없다.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마음을 끄는 이유를 명확히 밝히고 왜 그것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하여 ‘나’는 이것을 선택했노라는 자기 입장을 내보일 때 등단제도에 관한 판단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문학에 관한 판단은 아름답지 않을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필시 창작 역시 그러할 것이다.
최진석
2015년 <문학동네> 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사건의 시학. 감응하는 시와 예술』 등 저서를 냈으며 2023년 '젊은평론가상'에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