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2025.3월호

그래도 여전히 예술은 힘이 세다


곽병창 극작가·우석대 교수


위기의 시대이다. 위기라는 말도 부족해 보일 정도로 세상을 이끌어가는 가치관들의 충돌이 극심하고 혼란스럽다. 12.3 내란 이전에 적어도 계엄령을 한두 번 정도 겪어본 세대들에게조차 최근의 이 혼란은 낯설고 황당하다. 사오십 년 전의 그 삼엄한 시국에도 일상은 흘러갔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빴다. 그때에도 청춘들은 짝을 찾아 연애를 했고 나라 걱정하느라 좋은 시절을 바치는 친구들에게는 일말의 존경심과 미안함을 느낄 줄 알았다. 


지금, 독재정권과 싸우던 사오십 년 전보다 더 절박한 위기의식이 느껴지는 것은 이런 모든 평범한 상식과 일상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를 옹호하고 계엄령이 정당했다는 악다구니가 날마다 거리를 뒤덮고 넘쳐흐른다. 잘못된 피해의식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자들이 대명천지에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며 늑대 이빨을 드러내고 공화국 최후의 보루라 할 사법기관마저 폭도들에 의해 무참히 침탈당한다. 선거제도의 근간에 대한 의도적 불신, 북한을 포함한 특정 국가에 대한 저주와 음모론으로 평화와 공존이라는 단어들은 아예 빛이 바랠 지경이다. 2030 남성들의 동시대 여성에 대한 적개심과 혐오는 더욱 심각해서 언감생심 달달한 로맨스는 이제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 강퍅한 주장과 선동은 결국 편집증에 사로잡힌 일부 극우세력과 종교집단의 야합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문제는 제도권 정당과 언론들까지 정파적 이익에 눈이 멀어서 이들의 주장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세계적으로 극우 파시즘과 타자 혐오의 정서가 점점 더 팽배해지는 걸 확인하면서, 수백 대의 버스로 전국을 돌며 왜곡과 혐오의 언어를 쏟아내는 21세기형 히틀러유겐트와 홍위병들을 보면서, 이런 세상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는다. 


첫째, 세상이 골백번 바뀌어도 예술가들의 설 자리는 여리고 약한 존재들의 곁임을 망각하지 않는 일이다. 예술가의 일차적 사명은 결국 이 극단적 경쟁의 시대에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치이고 내몰려서 한뎃잠을 자는 이들의 곁에 머무르는 일이다. 강자들의 논리, 승리한 자들의 번듯한 세계관에 철저히 복무하는 예술들로는 가치관의 전복으로 몸살을 앓는 이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함께 외치는 일이 예술의 궁극적 사명임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한다. 그 길 위에서 이른바 거대한 민중들의 세세한 일상이 보일 것이고 외국인노동자와 가자지구의 난민들이 보일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나라가 물에 잠겨가는 바누아투의 절박함도 북극곰의 눈물도 보일 것이다. 


둘째, 평화와 비폭력의 소중함을 전파하는 발신자 노릇을 예술가가 감당해야 한다. 나치즘과 문화대혁명 같은 시대가 끔찍했던 이유는 그것이 불특정 다수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고 옹호하는 일에 쓰였기 때문이다. 이웃들의 사상을 검열하고 아이들의 친구까지 의심과 차별의 눈초리로 감시하며 마침내 서로 고발하고 처형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세상,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머지않아 우리 주변에서 그런 현상을 목도하지 말란 법이 없다. 불행하게도 그런 세상의 출발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폭력적 징후들에 대한 무딘 생각, 관용적 태도일지도 모른다. 만연해가는 저주의 언어들에 대하여 예술가들이 나서서 경종을 울릴 때이다. 


셋째, 옳고 그름, 선악 시비에 대한 분별력을 기르는 일이다. 예술이, 예술가가 세상에서 정직한 언어로 자신의 행위를 펼치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덕목은 옳은 가치를 전파하는 일이다. 물론 선악과 시비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행위하는 이, 보는 이의 위치에 따라 그 기준점이 옮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에 맞는 선악의 기준을 옳게 세워야 한다. 낡은 가치, 상대를 힘으로 제압하려는 폭압적인 논리, 특정 계급이나 성적 지향, 인종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주장과 이익을 관철하려는 태도 등을 경계할 일이다. 옳고 그름을 식별할 힘을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일, 작지 않은 사명이다. 


넷째, 예술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제 예술행위는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예술공간, 극장, 서점, 콘서트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이른바 생성형 AI의 등장은 예술 활동의 범주와 개념을 송두리째 변혁하라고 요구하고 있고, 길거리의 미술패, 노래패, 연극패 등의 퍼포먼스는 그 어떤 고상한 예술행위보다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이 모든 위기의식과 별개로 세상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초개인화(hyper personalization)하고 있다. 새로운 의미의 파편화한 독자, 관객, 청중들에게 응답할 궁리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전통적 가치관의 폭력적 전복을 날마다 목격하면서 예술의 사회적 책무와 그 힘을 다시 생각한다. 무릇 예술가들은 예술이 지닌 가치 복원의 기능을 믿어야 한다. 사적인 허무주의와 무의미의 늪에서 머무르는 한, 예술 행위는 때로 국수 한 그릇만도 못한 일일 수 있다. 결국 예술이 사회적 공기(公器)이고 예술하는 일이 중요한 공적 실천임을 자각하면서, 치열하게 창작하고 대중을 만나는 것만이 시대의 위기에 맞서는 올바른 예술가의 길일 것이다. 

 





곽병창 

극작부터 연기, 연출, 기획 등의 연극 일로 평생을 보냈다. 창작극회 대표, 관립예술단 무대감독,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등을 맡아 일했으며 지금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극작법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