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2025.11월호

로컬살이가 내게 가르쳐 준 것들


방경은 어반피크닉 주식회사 대표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로컬은 벨기에 브뤼셀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이전에도 몇 개월씩 해외에 머물러 본 적은 있었지만 집을 완전히 떠나 산다고 느껴지는 낯선 환경은 처음이었다. 불과 15년 전인데,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농담인듯 진담처럼 ‘남쪽? 북쪽?’이란 질문이 따라오곤 했다. 내가 알던 세상,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자, 존재감이 점점 사라짐을 느꼈다. 투명인간처럼 세상에서 지워진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말할 수 없이 외롭고 불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굳이 애쓰지 않는 나를 발견했다. 분명 고독하고 위축되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고 심지어 가볍기까지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교하고 견주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주는 자유였다. 다른 국적, 인종, 문화권의 사람들은 서로 경쟁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좋은 학벌, 급여 높은 직장, 서울의 부동산, 그리고 자녀를 위한 학군지 이동. 그때까지 내가 아는 서울의 삶은 일직선, 일방통행이었다. 하지만 한걸음 밖의 세상에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들이라는 것을 브뤼셀에 가서 깨달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기에 나 자신과 상의하고 결정해야 했다. 남이 아닌 내 감정과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하고 소박해진 생활 속에 마음은 충만했다. 


유럽에서는 굳이 수도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을 고집하지 않았고, 국경마저 큰 의미가 없었다. 처음 들어보는 소도시에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자리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갔다. 다이아몬드와 패션산업의 메카 앤트워프, 호가든 맥주의 호가든도, 오랜 역사를 가진 최고의 대학이 있는 루벤도 벨기에의 로컬이었다. 도시에는 저마다의 역사와 교육기관, 산업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했다. ‘한국은 다른가..?’ 평생 서울에서 나고 자랐던 내게 너무도 당연했던 서울살이가 정말 최선인지 의심스러워졌다. 주재원 생활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오자, 서울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딱 1년만 더 헤매겠다는 결심 속에 ‘말이 통하는 외국’ 제주로 향했다. 연세 계약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서울이 아닌 곳에서 계속 살아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섬이 아닌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좀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그렇게 낯선 환경, 정읍이라는 로컬을 만났다. 


나에게 제주와 정읍은 브뤼셀과 이스탄불만큼이나 낯선 환경이었다. 하지만 외국과는 차원이 다른 장점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말이 통했고, 다름도 넘길 수 있는 공통된 정서와 상식이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어도 필요하면 가족의 도움도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의료보험 같은 사회 보장망을 비롯해 당당하게 국민으로서 행정서비스를 누렸다. 로컬의 계절은 식탁으로 온다. 제철 식재료로 차려낸 반찬과 햅쌀로 지은 밥의 향기는 위장이 아닌 뼛속을 채웠다. 늘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서울에서는 높은 빌딩 너머로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지만, 로컬의 나지막한 건물 덕에 매일 달라지는 하늘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조금씩 깊어지는 초록빛, 노랗게 변하게는 들판, 흙냄새가 느껴지는 바람, 로컬에서는 눈과 코로 자연을 느꼈다. 그리고 놀랍게도 로컬엔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 직급과 연봉을 높이기 위한 자기개발이 아닌, 내게 있는지조차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는 자기계발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영어를 전공하고 해외마케팅을 하던 나는 로컬에서 공동체와 마을만들기를 만나 중간지원조직에서 일하게 되었다. 마을을 소개하는 TV방송을 진행하고, 도시재생 하는 공무원이 되기도 했다. 행사MC부터 강사, 진행자, 기획자로 활동하고 문화공유공간을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창업까지 했다. 로컬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할 수 없었을 일을 지금껏 해오고 있다.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의 터닝포인트는 낯선 환경에서 머물 때였다. 익숙한 관계와 삶을 벗어났을 때 비로소 새로운 내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경험과 생각을 담아 『생애 한번은 로컬』이란 책을 펴냈다. 로컬 덕에 저자가 된 것이다.


로컬은 서울 밖 지역이 아니다. 살거나, 경험해보지 못해 새로운, 낯선 환경이다. 때문에 로컬이란 말에는 반드시 머무르기가 포함되어야 한다. 로컬살이는 스쳐지나는 여행과는 다른 전환의 시간이다. 낯선 환경에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헤매볼 필요가 있다. 불안과 외로움에도 기꺼이 헤매는 결심이 전과 다르게 살 자유를 준다. 남의 시선, 이유도 모르고 따르던 평가 기준을 벗어나 잠시 숨돌리고 나를 바라볼 여유를 얻게 된다. 

 

생애 처음 만나는 낯선 환경이 로컬이라면 그 반대는 서울일 수 없다. 나는 로컬의 반대가 ‘고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향은 좀 신기한 구석이 있다. 아버지, 할아버지의 출생지를 되짚기도 하고 고등학교까지는 다녀야 한다는 등 자의적 기준이 제시되기도 한다. 어디든 동향인을 만나면 너무 반갑고, 고향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도 언제든 맘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떠올리면 마음이 한구석이 든든하다. 그런 곳이라면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이 나의 고향이다. 국적, 호적과 달리 고향은 호감과 결심만으로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 브뤼셀, 이스탄불, 제주,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정읍까지, 내게는 소중한 고향이 여러 개다. 어쩌면 낯선 로컬로 만나, 고향이 되는 것이 사람이 지역, 도시, 장소와 맺을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까.





방경은

서울을 떠나 제주와 정읍에서 11년을 살았다. 현재는 정읍에 '지역 여성 청년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일 경험'을 만들어주는 회사 어반피크닉을 세워 운영 중이다. ‘왜 생애 한번은 지역에서 살아봐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으며 책 『생애 한번은 로컬』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