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 작업실 책상 앞에 앉은 예술가의 마음은 복잡하다. "AI가 내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이 질문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AI는 이미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며, 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비슷한 순간들이 있었다.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 많은 화가가 회화의 종말을 예견했지만, 오히려 인상주의와 추상미술이 탄생했다. 디지털 음악 시대가 열렸을 때도 '진짜 음악'의 소멸을 우려했지만, 음악은 더욱 다양해지고 접근성이 높아졌다. 기술은 창작자를 대체하기보다는 창작의 지평을 확장해 왔다.
에베레스트 등반의 역사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베이스캠프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등정자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지상에서부터 모든 것을 준비해 올라가야 했지만, 훨씬 효율적으로 정상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에베레스트를 그라운드 제로부터 오르는 이는 없다. AI는 이 베이스캠프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창작자의 영감과 콘셉트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초안이나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이디어 하나를 구체화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를 찾고, 밤을 새워 스케치하고,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했다. 마치 평지에서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수천 미터의 험준한 산을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처럼 더디고 고된 과정이었다. 이제 AI는 창작자를 순식간에 베이스캠프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부터 정상을 향해 나아가면 된다. 에너지를 아껴야 할 곳은 초입이 아니라 정상을 향한 마지막 구간이니까. 물론 정상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험난하고, 그 여정은 오롯이 등반가 자신의 몫이다.
현장의 많은 창작자들이 경험하는 바에 따르면, AI는 특히 중간 단계에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반복적이고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을 빠르게 처리해주고, 여러 방향의 시안을 순식간에 보여준다. 음악 작곡에서 막막한 코드 진행을 찾을 때, 디자인 작업에서 다양한 시안들을 뽑아볼 때, 글쓰기에서 여러 방향의 전개를 탐색할 때 AI는 놀라운 속도로 다양한 선택지들을 제시한다.
반면 AI가 상대적으로 취약해 보이는 영역도 있다. 먼저 독창적 기획력이다. AI는 기존 데이터를 학습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뿐, 그 이상의 파격적이고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고안해내는 데는 한계를 보인다. "이런 건 어때?"라는 톡 튀는 제안은 아직 인간의 영역인 듯하다. 다음으로 섬세한 마무리 능력이다. AI가 만든 결과물이 창작자의 의도와 90% 일치한다 해도, 나머지 10%의 차별화와 손맛은 창작자 본인만이 발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맥락과 의미 부여다. 작품이 왜 지금, 여기서,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인간 창작자의 고유한 영역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AI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사례들을 나눠보고 싶다. 소설가가 '망각과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싶을 때, AI에게 관련된 신화, 심리학 이론, 역사적 사건을 요청하면 순식간에 수십 가지 연결고리를 제시받을 수 있다. 작가는 이 중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감각에 와닿는 소재를 선별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한다. AI는 재료를 모아주는 조수이고, 요리사는 여전히 창작자 본인이다. 시각예술가는 특정 색감과 형태의 영감을 얻고 싶을 때 AI 이미지 생성 도구를 활용할 수 있다. "따뜻한 느낌의 추상적 풍경, 오렌지 컬러와 보랏빛 중심"처럼 구체적으로 지시하면 AI는 수십 가지 시안들을 만들어준다. 창작자는 이 중에서 방향을 잡고, 자신의 손으로 최종 작품을 완성한다. 음악 창작에서도 AI는 코드 진행이나 멜로디 라인 탐색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곡의 전체적인 흐름, 감정의 기복,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은 여전히 작곡가의 구상과 감각에 의지한다.
중요한 것은 입력(프롬프트)의 질이다. AI에게 지시하는 문장은 창작자의 구상 능력이 응축된 것이다. "어떤 느낌인지, 왜 필요한지, 어떤 방향인지"를 명확히 할수록 AI는 더 쓸모 있는 결과를 내놓는다. 그리고 AI 출력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작품이 아닐 것이다. 반드시 자신의 손과 감각으로 최종 마무리를 거쳐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인간 대 AI"라는 구도로 미래를 걱정한다. 하지만 진짜 경쟁은 아마도 AI를 잘 활용하는 창작자와 그렇지 못한 창작자 사이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AI를 도구로 삼아 자신의 창의성을 증폭시킨 사람이 유리할 수 있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과 경쟁할 뿐이다.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언은 1964년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에서 전자 기술이 우리의 중추신경계를 확장한다고 말했다. 언어, 문자, 인쇄술이 인간의 능력을 확장했듯이, AI는 우리의 사고력과 창의성을 확장하는 새로운 도구일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질문은 이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이다.
2026년, AI는 더 이상 선택의 대상이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쓸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인가'다. 그 답은 아마도 구상하는 힘과 마무리하는 손맛에 있을 것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중간 과정을 AI가 빠르게 채워주는 동안, 창작자는 더 본질적인 질문과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새해, 두려움 대신 호기심으로, 회피 대신 실험정신으로 AI에 다가가 보면 어떨까.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처럼, 이 새로운 도구와 함께 더 넓은 창작의 세계를 열어갈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전성환
생성형 AI 활용에 주목,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AI의 실용적 활용법을 교육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문화예술과 최신 기술 트렌드를 접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외래교수와 우석대 광고이벤트학과 겸임교수, 전북도 홍보기획과장, 전주시시설관리공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