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년 새해를 맞아 필자도 ‘갓생’이란 단어에 눈이 간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서도 갓생을 결심하신 분들이 계실 것이다. ‘갓’은 영어 단어 God(신)을, ‘생’은 한자어 ‘生(살다)’을 뜻하는 단어이다. 즉, 신처럼 부지런하고 전능한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 거창하지는 않다. 하루 1리터 물 마시기, 감사 일기 쓰기 같은 소소한 습관을 매일 실천하는 것도 갓생이라고 한다. 언어학자의 시선에서 볼 때, ‘갓생’과 같은 신조어의 등장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갓생’에서는 소소하지만 꾸준히 나를 계발하는 삶을 좋다고 생각하는 요즘 세대들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불확실성이 커진 사회이다. 먼 미래의 대박보다는 당장 내 손에 잡히는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 청년들의 희망이 ‘갓생’이란 두 글자에 담겨 있다.
‘가성비’란 단어는 많이 아실 것이라 생각한다. 가격 대비 성능의 시대가 한동안 있었다. 사실 필자는 아직 가성비가 마음에 든다. 그런데 요즘은 '시성비' 시대다. 시간 대비 성능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기다렸다 보던 공중파 방송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고,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내가 원하는 시간에 보는 것을 넘어 필요한 장면만 발췌해서 보거나 몇 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현대인의 급박한 일상이 시성비란 단어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이렇게 신조어는 구구절절한 사회학적 분석을 곁들이지 않더라도, 그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신조어는 시대를 반영한다.
하지만 신조어가 시대를 명쾌하게 반영하는 이면에는 ‘단절’도 있다. 언어의 본 임무는 소통이다. 하지만 요즘의 신조어들은 세대와 계층을 가르는 거대한 벽이 되고 있기도 하다. 필자가 제시한 갓생, 가성비, 시성비란 단어가 처음 듣는 단어였다면 어떠한가.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가족들 간에도, 학생들이 모인 대학 강의실 안에서도 갸우뚱한 얼굴 하나 정도는 볼 수 있다. 쏟아지는 줄임말과 유행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한자어 기반의 어휘를 낯설어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예전에 정부가 3일간의 연휴를 정한 것을 언론에서 ‘사흘간의 황금 연휴’라고 보도한 적이 있었는데, 이 보도 기사에 달린 댓글 중 ‘3일 쉬는데, 왜 사(4)흘이라고 하냐’라는 댓글을 단 누리꾼들이 있었다. 사흘은 3일을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말이다. 심심(甚深)한 사과를 재미없고 지루한 사과로 오해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도 한자어와 순우리말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단 댓글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현상은 요즘 젊은 세대가 무식해서가 아니다. 한자어 교육을 받으며 활자를 통해 어휘를 익힌 기성세대와 영상과 디지털 매체로 언어를 익힌 디지털 원주민 세대인젊은 세대의 언어 경험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진 두 세대가 통역 없이 함께하고 있는 시대가 지금인 것이다. 기성 세대가 느끼는 언어의 장벽은 디지털 기기 앞에서 더욱 커진다. 스마트폰이나 식당의 키오스크에도 줄임말과 외국어, 신조어가 잔뜩이다. 처음 보는 음식 이름에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다. 직관적이지 않은 언어들 앞에서 기성세대는 현대판 문맹이 될 수도 있다.
갓생, 시성비는 긍정적인 단어지만, 혐오와 차별이 잔뜩 들어가 다른 집단을 평가하는 신조어도 있다. 에겐남, 테토녀, 맘충, 잼민이는 특정 집단을 평가하거나 낙인 찍는 단어들이다. 에겐남과 테토녀는 각각 남성에게 에스트로겐이, 여성에게 테스토스테론이 많다는 뜻의 신조어이다. 여성적인 남성과 남성적인 여성, 이렇게 다른 사람을 호르몬 수치로 평가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충’은 벌레인데, 엄마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맘’에 충을 붙였다. 엄마가 벌레라니 이건 어떤가.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잼민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표현들은 재치 있는 표현이 아니라 언어 폭력으로 느껴진다. 타인을 단어 하나에 가두고 등급을 매기는 행위이다. 에겐남, 테토녀는 차치하더라도 맘충, 잼민이 같은 단어에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의 수고가 생략되어 있다.
특정 집단끼리만 쓰던 ‘은어’가 ‘자신들끼리의 유대감’을 다지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현대의 신조어는 의도하지 않게 은어가 되기도 한다. 신조어를 몰라서 유행에 뒤처진 사람이나 말이 안 통하는 꼰대로 낙인찍히는 순간, 언어를 통한 소통의 의지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같은 한국어지만,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듯한 단절감은 언어 사용자 간의 고립을 심화시킨다. 시대를 가장 빠르게 반영하는 신조어가 정작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외시키기도 하는 모순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언어는 유기체다. 끊임없이 생기고, 없어진다. 새로운 말이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어의 변화 속도가 아니라 언어가 가야 할 방향이다. 나의 재치 있는 신조어가 누군가에게는 소외의 이유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한다. 이런 게 언어적 감수성이다.
2026년 새해. 저마다의 ‘갓생’을 향해 달릴 시점이다. 갓생을 위해 달리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속도를 늦추고 옆 사람과 눈을 맞추며, 함께 사는 삶을 위한 언어를 고민해 보면 어떨까? 말이 벽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말이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는 세상이 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안미애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파라미타칼리지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이자 한국어문화원장을 맡고 있다. 주로 한국어의 말소리와 역사적 발달 과정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공저로 『한국어음운론』, 『통통 글쓰기1, 2』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