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발 KTX 열차 도착 문구가 전주역 대합실 전광판에 뜨자 내 마음은 자그마한 두근거림으로 술렁였다.
‘17년 만이던가….’ K와 전주역 앞 허름한 식당에서 소줏잔 기울이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던 해가 2009년이었으니, 참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우리에게도 주름과 흰머리가 많이 늘었다. 평일이라 비교적 한산한 여행객들 사이 저만치서 활짝 웃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K가 보였다. 우리는 두 손 꼭 잡고 악수를 나눈 후 첫마중길에 들어섰다.
“역 앞 대로변에 이런 멋진 길이 생겨났군요.” 계속되는 감탄사와 함께 연신 전주역 앞 첫마중길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던 K가 어느 순간 불쑥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아니, 이렇게 멋진 장소에 왜 이리 사람이 없죠?” “글쎄…” 나는 무슨 답을 꺼내야 할까 잠시 골몰하다가 어느새 도착한 첫마중길 여행자도서관 안으로 그를 황급히 밀어 넣었다. 평일의 도서관 역시 무척 한산했다. K와 함께 하기로 한 전주에서의 1박2일 도서관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K는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어린 오랜 지기다. 여수에서 나고 자라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그가 아무 연고 없는 전주의 어느 모임에서 나를 만난 때가 1999년 여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 시절 나는 군 제대 후 뒤늦게 들어간 대학교의 주변부만 맴돌던 스물다섯 살의 애늙은이였고. 그해 여름, 소란스러운 술자리가 1차에서 2차로 이어지던 어느 시점에 우연히 한창훈의 소설 『홍합』이 안줏거리로 떠오르자 조용히 앉아있던 나와 K의 말이 섞이기 시작했다. 신경숙이 나오고 윤대녕이 나오고 끝내 시인 기형도가 얘깃거리로 등장하자 우리 둘은 서로의 인연이 평생 얽히게 되리라는 어떤 예감에 휩싸였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섯 살 터울의 형 동생이라기보단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는 든든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타셴(Taschen) 책들을 이렇게 원 없이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것도 전주에서.” 서울의 한 언론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는 K는 콩나물국밥을 먹으며 오전에 방문했던 첫마중길여행자도서관에서의 소회를 털어놓기 바빴다. “1980년 독일에서 탄생한 타셴은 명실공히 세계적인 아트북 브랜드예요. 누구 아이디어죠? 그 사람에게 박수쳐 주고 싶네요. 내가 전주에 살고 있다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그 도서관에 드나들 것 같은데요? 전주 사람들 정말 복 받은 거예요 하하.”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K와 나 사이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책이나 책방에 관한 것이었다. 만나면 각자 관심 있게 읽는 책과 작가를 화젯거리로 올렸고, 가끔은 나름의 동선을 짜 서울 구석구석 헌책방 순례를 함께 즐기기도 했다. 아주 예전에는 전주에서도 그런 투어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하나둘 없어져 가던 헌책방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자 K의 전주 방문 또한 뚝 끊기고 말았다. 그 후 긴 시간 동안 K와 나의 만남은 서울에서만 지속되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내가 그의 전주행을 부추겼던 것이다. 이런 미끼와 함께. “전주에 정말 멋진 도서관들이 많이 생겼어. 오면 후회하지 않을 거야.”
점심식사 후 우리는 전주한옥마을로 향했다. 유명 관광지로 뜨기 전 이곳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함께 거닐던 청춘의 시간들. 그 아련한 추억이 휘발되어 버린 공간에서 우리는 하릴없이 서성였다. 그런 아쉬움을 상쇄시킬 겸 한옥마을도서관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미로 속 작은 둥지처럼 자리 잡은 이곳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추억의 조각들을 수습하기 위해 한참을 궁리했고, 그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피 무늬 고양이 한 마리가 서재 한 귀퉁이에 몸을 푼 채 무심한 표정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영원한 것은 없어. 모든 것은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지.’ 한옥마을도서관이 우리에게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듯했다.
저녁으로 맛난 어죽을 사 먹기 전, 우리는 식당 옆 아중호수도서관에 들르기로 했다. 제법 빡빡한 하루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으나 K는 이곳에서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멋지게 설계된 내부 공간도 끝내주지만 창밖 멋진 호수 풍경을 바라보며 LP음반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를 더 흥분시키는 듯했다. “전주가 미쳤군요. 이런 멋진 도서관들을 콘셉트까지 다양하게 곳곳에 지어놓다니. 심지어 전주시청 로비도 도서관으로 꾸몄다면서요?” “우리가 예전에 자주 갔던 동문거리 헌책방들 기억나? 그 골목에는 헌책도서관이 생겼어!” 음반을 뒤적이던 K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톰 웨이츠가 없다며 불평하면서도 연신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명색이 문화부 기자인데 이런 고급 정보를 놓치고 있었다니…. 서울 것들이 역시 지방 소식에 취약하긴 하죠. 하하.”
헤드폰을 낀 채 비틀스 음악을 들으며 호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K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스민 듯했으나 나는 못 본 척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한 명의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K의 일상도 녹록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렇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위로를 받는 순간이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하고.
다음 날 오후 늦게 우리는 학산숲속시집도서관으로 향했다. 2003년 가을, 우리는 시인 기형도의 산문집에 담긴 여행기를 따라 전주 황방산 자락의 사찰 서고사를 들른 적이 있다. K는 숲속에 자리한 시집 전문 도서관을 찾아가는 길이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마치 세상 다 산 것처럼 호들갑 떨었지만, 사실 그때 우리는 무척 젊었어.” 길옆 나무숲에 어느덧 연두 봄빛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보며 나는 읊조리듯 그렇게 말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시인 중 적잖은 이들이 세상을 떴다. 학산숲속시집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우리는 그들을 추모하는 순간들로 채웠다. 그리고 아직 채 풀어내지 못한 기억들은 애써 봉인한 채 우리 둘은 다음을 기약하며 전주역으로 향했다.
“형, 이번 여행 또한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전주에서의 시간은 내게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아직 가보지 못한 도서관들을 다음에 자신의 아내와 딸까지 대동하고 방문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털어놓으며 K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내 걸음걸이는 눅진한 아쉬움을 털어내기에 바빴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전주에 관한 새로운 색깔의 추억 하나 선물해 주었다는 보람이 가슴 한구석 온기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K의 초등학생 딸이 그림책을 유독 좋아한다니 다음에 오면 팔복예술공장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부터 데리고 가야겠군. 중화산동 정원문화도서관 길 건너 식당 돈가스가 제법 먹을 만하다던데….’ 다양한 도서관 목록과 동선을 짜며 첫마중길로 들어서던 내 시야에 깔깔대며 뛰어노는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잡혔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해맑은 소년 소녀들의 천진한 웃음소리. 첫마중길 끝자락으로 떨어지는 노을빛을 받으며 내 얼굴에도 그 순간 미소가 슬쩍 스쳐 갔을까.
그래, 어쩌면 나는, 이 세상 가장 좋은 도서관 도시에 살고 있는지도 몰라. 타셴 아트북을 감상하기 위해 나는 첫마중길여행자도서관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이휘현
KBS전주방송총국의 PD로, '백투더뮤직', '우리집 금송아지', '새만금 표류기', '이슈잇수다' 등 여러 시사교양 및 예능,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연출했다. 오랜 기간 문화저널에서 '이휘현의 숨은 책 좋은 책'을 연재했으며, 현재 문화저널의 편집위원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