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2026.9월호

좋은 비평은 결국 세상이 만든다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평론가의 의견이 자주 비판받는 시대다. 사실 관계가 틀렸거나 편파적이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하면 비판받는 게 당연하지만 이유는 그게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를 사용했다거나 자신과 다른 판단을 했다고 비난하는 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이니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원칙을 생각하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지식인의 권위에 억눌렸던 대중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솔직하게 밝히게 되었으니 민주화되고 있다고, 권위가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해지는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지나치게 감정적인 비난이 횡행할 뿐 아니라,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추론하거나,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했다고 상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이 빈번하다. 어떤 텍스트를 읽고 비평하거나 상대를 비판/비난하려면 최소한 원 텍스트는 다 확인해야 하는데 다 읽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곡해해 이야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해력이라는 단어가 주목받은 이유다. 내 경우에도 책에 쓴 글 가운데 일부만 가져와 의견을 묻는 경우를 보았다. 영화나 그림, 시의 일부만 가지고 평가하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럼에도 진영론이 팽배해진 요즘에는 옳고 그른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 편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한 이야기를 납작하게 만들어 금세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피아 구별을 명쾌하게 하는 이야기가 더 많은 호응을 얻는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해설해 주는 사람이 더 사랑받는 현실, 특정 계파에 충실한 정치인이 각광받는 현실은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시대에서 누가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할까. 이편도 저편도 아닌 의견을 솔직하게 밝히기보다는 입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복잡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해도 존중받지 못하면 유행과 영합하게 된다. 한두 가지 변화로 이루어진 현상은 아니다. 한국의 경우 생활 수준이 높아지고 대졸자를 비롯한 고학력자가 많아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보다 뭔가 아는 사람, 자신이 뭔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세상은 예전처럼 다수의 대중은 모르고 소수의 지식인이 지식을 독점하는 세상이 아니다. 기술의 변화도 엄청나다. 1990년대 말부터 인터넷을 활용하면 얼마든지 정보와 지식을 캐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AI의 힘을 빌리면 더 쉽고 간단하게 지식과 정보를 채울 수 있다. 게다가 순식간에 수준급의 작품까지 생산할 수 있다. 아직 AI가 완벽하지 않지만 AI에 경도된 한국에서는 AI의 실책 같은 건 문제도 아니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경제와 기술의 성장은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민주주의와 평등의식이 일반화되면서 권위가 사라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자유주의 사회는 모두를 동등한 소비자로 만들어버렸다. 뭔가를 살 수 있다는 힘은 모두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감각과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했다. 그 결과 조금만 자신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견디지 못한다. 아니 견디려 하지 않는다. 바로 평점 테러를 하거나 민원을 제기하는 식이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모두가 모두에게 불편을 신고한다. 요즘에는 소셜미디어를 활용해 모두가 인플루언서가 되려는 현상도 강력하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지식인이 권위를 갖고 평론가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가령 음악평론가가 특정 음악인의 음악을 호평하면 팬덤이 열광하지만, 부족함을 지적하면 금세 만고의 원수가 되어버리는 세상에서는 솔직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내세우지 못한다. 황희정승처럼 자네 말도 맞고, 자네 말도 맞네라고 말하거나 입을 닫는 게 속 편하다. 


평론가의 권위가 굳건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앞으로 더 많이 변할 것이다. 당연히 비평가의 말하는 방식 또한 변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평론가가 엄정하게 평론을 하고, 더 알아듣기 쉽게 글을 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전에 비평가와 대중이 서로의 역할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고, 때때로 혹은 자주 자신이 모를 뿐 아니라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누구든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렇다 해도 자신이 무시당하는 게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식이 권력이 되는 세상도 문제지만, 전문가가 사라진 세상, 모든 권위가 사라진 세상도 문제 아닌가. 사실 세상은 대단하지 않은 사람들의 선의와 노력으로 굴러간다. 그 어느 때보다 배려와 존중이라는 태도가 간절해지는 이유다. 좋은 비평도 결국 세상이 만드는 것이다.





서정민갑 

20여 년 음악에 관한 글을 쓰며, 자신을 '평론가'라는 호칭 대신 '의견가'라 소개하며 살아온 대중음악의견가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구현되는 방식과 사회적 역할에 특히 관심이 많다. 2004년부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광명음악밸리축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눈치 없는 평론가』, 『그렇다고 멈출 수 없다』, 『음악열애』, 『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