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짓는’ 사람들   2024.3월호

지식문화의 꽃을 새기다

: 40년 판각 외길, 완판본문화관 안준영 관장



문신
 시인ㆍ편집위원


안준영 관장



인류가 발명해낸 가장 위대한 것 가운데 하나는 언어다. 언어는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정교하게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고, 공동체 구성원의 소통을 매개하는 핵심적인 도구로 발달했다. 인류 초기의 언어는 소리였다. 구술언어는 즉각적인 소통 가능성을 장점으로 삼았으나 일회적이고 저장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보를 저장해서 시공간의 제약 없이 유통할 수 있는 문자언어가 탄생했다. 문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인류는 다양한 정보를 저장ㆍ유통할 수 있게 되었고, 정보가 저장됨으로써 문화적으로 획기적인 도약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기록된 문자 정보가 누적되면서 지식체계가 형성되었을 뿐 아니라,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영역까지 인간의 사유가 확장된 것이다.


문자적 정보가 가장 밀도 있게 집대성된 사물은 오랫동안 책의 몫이었다. 한 권의 책에는 하나의 세계가 담겨 있다는 말이 있듯, 근대 이전의 책은 일반적인 사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을 지녔다. 문자를 읽고 독해하는 능력은 특별하게 취급되었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책은 지식인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핵심으로 자리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준 건 인쇄술이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지식의 생산과 확산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알다시피 서구 유럽이 인문주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건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있어서가 아닌가!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후기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사업에서 인쇄문화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전란의 시기에 불심(佛心)으로 환란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불경을 목판에 새겨 찍어내는 고도의 작업으로 이어졌다. 경남 합천의 해인사에 보관된 당시의 목판은 우리의 고인쇄 문화 수준을 알 수 있게 한다. 목판 인쇄는 활자본 인쇄 및 근대적 인쇄기가 나오기 전까지 지식 정보를 생산ㆍ유통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중에서도 전주를 중심으로 발달한 완판본 인쇄문화는 호남 학자들의 학문 세계와 판소리계 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장은영 작가가 동화 <책 깎는 소년>에서 목판에 문자를 새기는 과정을 “시간이 흐르자 글자들이 하나 둘 드러났다. 책판 위에 꽃들이 활짝 피어난 것 같았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책판의 문자는 한 송이 꽃과 같았다. 동시대에 활짝 피어난 지식문화의 꽃.



완판본으로 간행된 심청전



꽃을 새기고, 문향을 입히는 세계

전주에서 문자의 꽃을 섬세한 손길로 새기는 사람이 있다. 완판본문화관의 안준영 관장이다. 안준영 관장은 <열여춘향슈졀가>, <홍길동젼> 같은 완판본 소설을 판각하여 출판한 데 이어, 2023년에는 시민 각수와 함께 <천자문>을 작업했다. 올해는 완판본 출판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판소리계 소설 가운데 <별춘향전>을 복원하려고 한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근대 태동기에 다수의 서포를 중심으로 전주의 출판문화가 자생적으로 발생했던 것처럼, 완판본 문화를 사랑하고 지켜내기 위해 함께 뜻을 모아준 시민 각수가 있어서 가능할 듯하다. 그렇다면 안준영 관장이 생각하는 목판 인쇄의 매력은 무엇일까?


“새김 혹은 각을 기술적인 면에서 볼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방식을 경계합니다. 저는 이 작업을 문화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해석합니다. 판각은 새김에서 끝나는 작업이 아닙니다. 판각 자체가 책을 만들기 위한 활동입니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교정 작업 같은 현대 출판에서 이뤄지는 일이 담겨 있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판각이 고급 콘텐츠를 취급한다는 점입니다. 각을 하는 과정은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고, 시간과 공력이 많이 투입되는 활동입니다. 그래서 당대 석학의 문집 같은 고급 정보만이 새겨집니다. 목판 인쇄 출판은 한마디로 고급 정보를 생산하는 출판 활동이지요.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인문학적, 미술사적, 종교사적으로 중요한 정보가 새겨지고 출판됩니다. 바로 이런 점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힘입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지식 정보의 소통이 새김의 예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지식량이 늘어나면서 우리의 삶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되는 추세다. 효율을 중시하는 포드식 공장 시스템이 보편화되면서 일과 능력이 조각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간 자체가 유기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관계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기계의 부속품 갈아 끼우듯 파편화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이를테면 전체를 조망하고 아우를 수 있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안준영 관장에게 판각은 바로 그러한 삶의 바탕이다. 나무를 벌채하고 건조하고 틀을 다듬어 책판을 만드는 일부터 책판에 새길 지식 정보를 선정하고 그것을 새긴 후 교정하고 양질의 한지를 골라 인출한 후 견고한 책으로 묶어내는 일을 빈틈없이 해낼 수 있어야 진정한 장인이다. 쉬운 길이 없고, 긴장되지 않은 순간이 없다.



“스무 살 되던 해에 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새김질에 관심은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해인사 스님과 인연을 맺었어요. 제가 판각에 관심을 보이고, 그 일에 어느 정도 자질을 보여주자 장경각을 보여주었어요.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곳이죠. 책판을 마주한 순간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오게 만든 원동력이지 싶어요. 전주에 오기 전에는 해인사와 영각사에서 옛 판각을 공부했습니다. 남덕유산 자락에 있는 영각사는 조선 시대에 호영남의 불경을 많이 간행한 사찰입니다. 영각사에서 공부하다가 해인사로 돌아가 계속해서 판각울 공부했죠. 그곳에서 문화학교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판각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식 문화운동으로 꾸려갔습니다.” 


판각은 지식을 생산하는 콘텐츠

안준영 원장이 전주에 터를 내린 지도 스무 해 가까이 된다. 알다시피 전주는 조선시대 출판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에서 발간한 책을 경판본이라고 한다면, 전주에서 발행한 책을 완판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완판본이라는 명칭은 기본적으로 출판된 지역을 의미하는 서지사항이다. 하지만 완판본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책을 출판한 지역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완판본에는 전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의 지식 정보가 담겨 있고, 지역에서 생산된 한지의 우수성, 그리고 지역 각수들의 빼어난 장인정신이 어우러져 있다. 그런 까닭에 안준영 관장은 판각이 기술이나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걸 경계한다. 완판본의 가치에서 알 수 있듯, 판각은 기예를 넘어 동시대의 지식과 정보를 생산유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각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부족하고, 그것이 출판인쇄문화로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다.


“각자장이라고 새김을 특화한 기술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새김만으로는 부족하죠. 판각이 고인쇄장 영역으로 들어가거나 판각장이 별도의 종목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제가 책판장 종목으로 신청했는데 통과되지 않더군요. 알다시피 제가 하는 일이 종합적이고 복잡한 일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노력해야죠. 사실 출판 문화적인 차원에서 보면 각자장은 절름발이에요. 책판에 글자를 새기는 공예 행위에 그치니까 출판 인쇄문화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식정보화 사회의 복판을 살고 있다. 지식 정보가 현재와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완판본에 바탕을 둔 출판인쇄문화다. 출판 인쇄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직지심체요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세계적으로 앞선 문화적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완판본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지식생산 콘텐츠다. 이것이 안준영 관장이 대장경문화학교를 열고, 이를 통해 수많은 시민 각수를 배출해내는 이유다. 그는 완판본의 출판인쇄문화가 과거를 넘어 현재와 소통하고 그것이 미래 사회의 중요한 지식산업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책판 제작 과정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를 희망한다.




“판각은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을 만들려면 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해야 하죠. 그동안 제가 가르치고 배출해 낸 시민 각수가 400명이 넘지만, 그분들이 전업으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이 안 되잖아요. 그렇더라도 할 수 있다면 저는 그분들과 더불어 <동의보감>을 작업해보고 싶습니다.”


<동의보감>은 과거에 완판본으로 간행되었고, 그 목판 일부가 현재 전북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동의보감>은 국가가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해 펴낸 책으로, 거기에는 애민정신이 담겨 있다. 안준영 관장은 그와 같은 정신을 우리 시대에 다시 생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출판문화의 도시 전주의 맥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가 꿈꾸는 판각의 꽃이 전주와 완판본문화관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날을 기대해본다.



사진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