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텁지근한 밤이었다. 기록적인 폭염 속, 생업을 내려놓고, 농사일을 미뤄가며 자신의 삶터를 지키고자, 7월 30일 남쪽 끝 해남에서 출발해 8월 20일 서울 청와대 사랑채 앞까지 걸어 온 이들의 여정은 청와대 앞 노숙 농성으로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꼬박 밤을 새우면서 대통령의 응답을 기다렸다.
20일, 34만 5천 볼트 송전탑이 지나는 27개 시군을 거쳐 온 용인 반도체 산단 재검토와 송전탑 반대 전국행진단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삼성반도체 국가산단 무효소송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전자 사옥까지 행진을 이어갔다. 양버즘나무 가로수 사이 간판이 밤낮 없이 불을 밝히고, 빌딩이 도열한 그 거리엔 전봇대 하나 없다. 국가와 국민의 지원과 노동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삼성전자 앞에서 우리는 소리를 높였다. 정부는 왜 수도권에 산업과 전력 수요를 끝없이 집중시키는가. 삼성전자는 왜 막대한 전기와 물이 필요한 반도체 공장을 수도권에 고집하는가. 왜 그 부담을 아무런 결정권도 없었던 지역 주민들이 떠안아야 하는가. 장거리 초고압 송전선로를 계속 건설하는 것 외에는 정말 다른 대안이 없는지 물었다. 실패로 끝이 날 용인 반도체 산단을 포기하고, 새만금으로 돌아오겠다던 투자 약속을 지키라 외쳤다.
비가 내리는 광화문에서 우리는 전국에서 모인 주민들과 만나 청와대까지 행진과 집회를 마쳤다. 경과지 주민들을 배웅하고 대통령실 비서관과 간담회를 가졌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이야기만 반복됐다. 정부가 법으로 정한 계획인 만큼 되돌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 기구로 국가 차원의 공론화를 해보자는 제안에도 대통령실은 법적 근거 부족만 강조했다. 다만 송전탑 노선과 변전소 위치를 정하는 입지 선정위원회 절차를 개선·보완했다는 것과 송전탑 수를 줄이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서 대통령과 면담하자는 것 아니는 물음엔 답변을 피했다. 대신 기후에너지환경부와 대통령실 대책위 3자가 만나서 대화를 이어가자는 수준에서 간담회는 끝이 났다.
저녁 문화제는 이재명 정부에 대한 성토의 장이 되었다. 같은 날 국회에서는 민간 자본에도 송전망 사업 시행권을 터주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게 이재명 대통령의 응답인가 싶었다. 정부와 국회가 주민들의 절박한 목소리에 답하는 대신 선택한 것은 송전망 건설의 속도를 더욱 높이는 것이었다. 기존 한국전력뿐만 아니라 민간사업자까지 전력망 개발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다. 민간의 효율은 자본의 집중과 사익 추구를 통한 속도전이다. 그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권리와 생태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공공성은 뒷전이 될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 관련 토론회도 있었다. 환경을 지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첨단산업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며 주민들을 배제한 채 공급 확대만을 외쳤다. 새만금개발청은 현대차 투자에 발맞춰 산업단지를 2.1배 확대하고 RE100 산단을 조성하겠다는 새만금 기본계획 변경안을 발표했다. 전력 수요가 과연 적정한지 검증하고, 수요를 분산하고 줄일 방법을 먼저 찾는 것은 뒷전이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새만금에서 에너지 지산지소와 균형발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상생의 안을 만들 수 있다. 이번 기본계획에는 국가산업단지를 1개소(12.1㎢)에서 4개소(35.7㎢)로 확대하고, 이들 산단을 RE100 산단으로 조성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전북 서남권 해상풍력 전기는 새만금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면 신정읍 변전소로 연결하는 345kV 노선은 없어도 된다. 새만금 산단의 전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커지는 만큼 새만금에서 쓸 전기도 모자란다. 새만금 변전소에서 신서산과 청양으로 가는 345kV 2개 노선은 백지화도 가능하다. 수조 원의 예산이 절감될 뿐만 아니라, 기업이 필요한 때에 전기를 공급받을 수 있어 사업 속도와 실행력도 높일 수 있다. 그런데 새만금 기본계획이나 국가전력망계획에도 이 부분이 빠져있다. 부처 간 장벽 때문이다. 대통령이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송전탑 터미널인 전북은 가장 극심한 피해 지역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과 장기송변전설비계획에 따르면, 전북 도내에만 345kV 고압선로 총 26개 사업(1,070km)과 8개 변전소가 들어설 예정이다. 전북은 호남에서 용인 반도체 산단으로 전기를 보내는 국가기간 전력망 5개 노선의 시·종점 역할을 담당하며, 그 땅에만 2,200여 개의 초고압 송전철탑이 빽빽하게 들어서게 된다. 또한 높은 재생에너지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계통 병목 현상과 수도권 중심의 전력 소비 체계로 인해 2031년까지 재생에너지를 계통에 연계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흘간 전북 주민들은 트랙터와 트럭에 송전탑 반대 깃발을 달고 도로를 누볐고, 구석구석 홍보전을 펼쳤다. 7번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3,855km 송전선 노선을 그려 넣은 대형 현수막을 내걸고, 송전탑 모형을 이용해 결박당한 주민의 모습을 표현한 상황극도 진행했다. 진안·장수·무주의 산골 마을에서는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무진장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금강 유역이자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청정 지역이면서, 최근 농어촌 기본소득 지자체로 지정된 곳이다. 기본소득으로 마을이 살아나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마을에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는데, 그 옆으로 초고압 송전탑이 들어선다니 억장이 무너질 일이라고 한다.
서울에 모기가 덜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땀에 전 몸은 모기의 표적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횡단보도 두 곳을 건너야 했다. 새벽 2시를 넘겨, 청와대 옆 무궁화공원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어린 수달을 만났다. 졸려서 잘못 본 것인가, 두 눈을 의심했다. 십수 년간 수달을 봐 왔고, 더구나 뛰는 모습이 딱 봐도 수달이었다. 이런 사례는 인터넷 검색으로도 확인되지 않았다. 국립생태원 전문가에게 물어보니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연못 잉어 습격 사건이 있었고, 너구리 소행으로 결론 났다고 한다. 다만, 그때는 한강 본류 등지에 수달 서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상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나타난 수달의 기적처럼 우리는 출근길 대통령이 농성장을 찾아와 우리의 말을 들어주길 기대했다. 정녕 꿈이었을까? 대통령은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