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은 동틀 녘에 논과 밭에 나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작물도 흙도 살아있는 것이다. 같은 작업도 시간과 때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다. 한 삼 년쯤 전부터 알람시간을 맞추지 않고 잠을 청한다. 알람을 맞추지 않는 것은 정해진 시계가 작물과 농사꾼을 연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작물은 해가 뜨면 일어난다. 여섯 시, 일곱 시 이렇게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하지 무렵에는 4시쯤 떠오르는 태양이 추운 겨울에는 7시는 넘어야 사위를 밝힌다. 그래서 농사꾼은 해가 뜰 무렵 일어나는 몸을 만들어야 한다. 식물과 내가 리듬을 맞춰야 농사가 순리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올해로 열 번째 농사를 이어가고 있다. 십년 차라고 하지만 아직 작물과 땅에 리듬을 맞추는 정도이다.
9년 전, 삼례역 철길 가상에 자리한 작은 텃밭에서 나의 농사는 시작됐다. 삼례역사 옆에 자리한 후정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동네 할머니들이 철길을 따라 조성해 놓은 텃밭들이 이어져 있다. 처음 기차역에서 내려 마주한 마을과 텃밭 풍경이 낭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철길텃밭 중 하나가 내 농토였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지금 와서 보면 마음 깊은 곳에서 열망이 일었던 게 분명하다. 아마 그런 감상은 스물 여섯이라는 나이가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낭만에 잔뜩 취해 더 볼 것 없이 전북 완주를 귀농지로 선택했다.
그때는 몸이 참 가벼웠다. 집에 중요한 옷과 짐들은 등산가방 하나에 들어가고, 전 재산을 모아봐야 100만 원이던 시절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잃을 것은 없고, 더할 것만 있던 시절이었다. 가방 하나와 100만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완주로 내려왔다. 보이는 모든 어른에게 인사하고, 들어오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6개월쯤 지나니, 완주라는 공간이 어렴풋이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전 재산은 300만원으로 불어나 있었다. 다시 한 번 모든 재산을 투자하여 20년이 지난 중고 트럭을 하나 장만했다. 트럭이 생기니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늘었다. 견문은 더 빠르게 늘었고, 나에게 맞는 농토는 무엇인지 또 어디에 가면 얻을 수 있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지금 있는 고산면 산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렵 견문을 넓힌 덕분이었다.
너멍굴에 와서 처음 지은 단칸짜리 초막
완주로 내려와 1년이 흘렀다. 직접 와서 부딪쳐보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눈치 보지 않고, 쫓겨날 걱정 없이 살 땅이었다. 목표가 명확해지면 삶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 해 겨울, 지금 까지 살고 있는 고산면 율곡리에 있는 산골로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산 너머 골짜기라 부르는, 사람은 살지 않는 산짐승들의 낙원이었다. 처음 그 땅을 보았을 때가 아직 생생하다. 멀리 보이는 산,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 계단처럼 이어진 논,밭. 이곳이라면 가세를 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싶었다. 산속 농토는 어르신들에겐 경작하기 힘든 땅이다. 마침 내 눈에 딱 맞는 땅 곁으로 왔고, 그 땅의 토지문서를 살 기회가 생겼다. 물론 대출로 산 영광이었지만 귀농 2년에 지주가 되었다.
산골에서 살기 위해 처음 필요했던 것은 비바람을 막아줄 방 한 칸이었다. 없는 살림을 긁어모아 절단기와 엔진 톱을 장만했다. 산 속에 쓰러진 나무들을 잘라오고, 흙과 짚단을 모아 초막을 하나 지었다. 농사만 산에서 짓고 집은 마을에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밭이 멀어지고, 눈칫밥 셋방살이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시간이 걸려도 내 손으로 집을 짓는 기술을 익히면, 그것이 재산이 되리라 믿었다. 두 달을 힘써 지은 방 한 칸은 누우면 발바닥을 벽에 붙이고, 머리를 맞은 편 벽에 기댈 수 있었다. 보잘 것 없어도 대간한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와 몸을 누일 방을 가지게 되니 비로소 땅이 경작될 수 있었다. 뒤로도 방을 한 칸씩 늘려지었고, 방이 늘어갈 때마다 농토도 점차 비옥해져갔다. 그 뒤로 2년 쯤 집짓기를 반복하니 제 몸 하나 가릴 기술은 손에 잡혔다.
농약의 무서움을 안 것은 농활에서였다. 그 날 작업은 유난히도 쉬웠다. 새벽녘에 밭에 나가 사과밭에서 약줄만 잡고 서있으면 된다고 했다. 약 뿌리는 사람이 편하게 줄을 잡을 수 있게 눈치껏 자리 잡고 서서, 당기고 풀어주기만 반복하면 되었다. 농사가 이런 작업만 있으면 농장울타리는 지평선에 박으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편리의 대가는 비쌌다. 오전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니, 머리가 핑핑 돌고,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쉼 없이 들렸다. 급하게 찾아간 보건소에서는 농약에 중독된 것 같다고 했다. 다행히 심하지 않다고 했다. 약기운이 빠지는데 하루가 걸렸다. 스치기만 해도 이렇게 고생스러운데, 약을 때마다 치는 농사는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겁이 많으니, 몸이 고생이다. 농약도 화학비료도 무서워서 치지 못하는 겁쟁이가 지을 수 있는 농법은 유기 농사뿐이었다. 현대 농법의 비기를 사용하지 못하니, 풀은 낫과 호미를 사용해 관리하고, 비료는 산등성이 낙엽과 냇가에 흐르는 충적토를 모아서 사용했다. 기껏해야 볼펜이나 움켜쥐던 서생이 자기 몸체만한 마대자루를 들어내는 일을 익히는 데는 수년이 걸렸다. 하지만 노고가 보람으로 돌아오는 것 또한 땅의 약속이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해가 거듭하면서 땅은 비옥함을 유지했고, 몸은 단단해졌다. 지금은 요령도 차츰 생겨나니, 처음 마대를 들던 날에 비하면 많이 편리해졌다.
진남현 씨 식구들
맨몸으로 산에 들어와 방 한 칸을 만들고, 그 한 칸들이 모여 집이 되고, 집이 옥답을 만들고, 옥답은 식구를 들였다. 초막이 나무집으로 바뀌던 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살림을 합쳤다. 그리고 이듬해 처음으로 보리를 갈아, 보리가 익어가던 오월 밭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식을 올렸다. 아내와 함께 산속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토종종자를 모으고, 전통농법과 유기농법을 익히며 한 해 한 해가 지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단칸방에서 두 명의 자식을 낳았다. 자식을 낳아 기르니, 농사의 이치도 더 쉽게 다가왔다. 그래서 옛말에 농사 중 농사는 자식농사라고 하나보다.
농사에서는 잘 기다리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너무 앞서지도 헐레벌떡 따라가서도 안 된다. 동 트기 전에 일어나 몸을 풀고 밭으로 나갈 채비를 마쳐야 하고, 작물에게 스스로 자라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급하게 해주려고 하면 틀림없이 일을 그르친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들판을 지켜보며 봄이 오는 소리를 면밀히 들어야 하고, 충분히 몸을 쉬게 하여야 한다. 작물이 씨앗에 몸속 양분을 모아 내년을 기다리듯, 가을에 거둔 씨앗들을 갈무리하고, 논, 밭을 준비하고, 산속 낙엽을 부지런히 모으며, 봄을 기다린다.
인간다운 삶을 찾아, 자유의 땅을 찾아 완주로 귀농한 90년생 청년농부, 『나는 너멍굴을 선택했다』의 저자이기도 한 진남현 씨의 농촌 라이프를 올해의 새로운 연재물로 만납니다. 재 너머에 있는 골짜기라 해서 ‘너멍굴’이라 불리는 곳에 찾아들고, 아내 황포도 씨를 만나 밭농사, 자식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자연주의 삶을 그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