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멍굴 포레스트    2025.2월호

고추씨앗을 고르고 뿌립니다


진남헌 청년농부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동지부터 태양이 하늘에 떠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입춘 즈음이 되면 아침이 제법 일찍 시작된다. 입춘이 지나 2월 중순 경 우수가 오면 봄이 시작된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오후의 햇살이 따사롭다. 여전히 땅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밀려오는 햇살은 땅속에 남아있는 냉기를 몇 주 안에 몰아낼 것이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정작 봄이 왔을 때 허둥지둥 때를 놓친다. 바야흐로 부지런한 농사꾼의 농번기가 시작된 것이다. 


제일 처음 씨앗을 붓는 것은 고추이다. 지난 해 빨갛게 익은 고추들에서 받은 씨앗을 사용한다. 요즘 고추들은 대부분 크기가 크고 과육이 두껍다. 그래서 건조기를 사용해 말리는 건고추가 많다. 하지만 씨앗으로 사용할 고추는 건조기에서 말려선 안 된다. 모양이 가지런하고 좋은 것들을 골라 수확해 태양 볕에 널어 천천히 건조해야한다. 수확 후에 습한 날씨가 이어진다면 어쩔 수 없이 종자로 쓸 고추들도 건조기에 말리게 되는데, 그때에는 40도 이하의 온도로 일주일 이상 말려 사용해야 씨앗이 잘 발아하고, 변형되는 종자가 적다. 잘 말린 고추는 찬바람이 불고 일이 줄어들면 배를 갈라 씨앗을 갈무리한다. 갈무리한 고추 씨앗은 입춘 즈음이 되면 물에 불려 좋은 종자를 다시 한 번 가리고, 정선한 씨앗을 온실에 부어 키우며 다가올 봄에 밭으로 나갈 준비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농가가 종묘회사에서 고추씨앗을 사서 사용한다. 그래서 좋은 고추를 고르고, 태양에 말리고, 또 정선하여 병 없는 씨앗을 만드는 수고를 덜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아직 토종종자를 사용하고 있기에 종자를 고르고, 씨앗을 채종하는 일이 일 년 농사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사서 쓰는 종자는 병해충에도 강하고, 무엇보다 생산도 많다. 그에 비해 토종고추 종자들은 생산량도 떨어지고, 병해가 많아 키우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토종을 키우는 이유는 각 품종들이 가진 특유의 맛과 풍미가 좋고,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있어 농사가 훨씬 재미있다. 




직접 지은 나무 온실



인위적인 것이 없는 자연 그대로를 원했다. 농사를 처음 시작한 해에는 온실에서 고추씨앗을 일찍 발아시키는 일이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온실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가는 많은 에너지와 공력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마침 책을 찾아보니, 4월에 날이 충분히 따뜻해지면 직접 씨앗을 땅에 파종하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직파가 된다면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때부터 고추농사 첫 해부터 2년간 온실 없이 직파로 농사를 지었다. 알량한 신념에 문자 몇 줄을 곁들이니, 그야말로 청춘의 치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선현께서 하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직파 고추농사를 지은 두 해 동안 고추를 한 소쿠리 이상 따본 기억이 없다. 대 실패였다. 물론 내가 텃밭을 일구며, 소일농사를 짓는 사람이었다면 그것만큼 재밌고 유익한 농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흙에 기대 먹고사는 농사꾼이 자연스러움만 찾으면 굶어죽는다. 2년 후에는 토종종자를 쓰더라도 온실에서 모종을 내기로 했다. 


2년을 줄곧 농사로 거둔 것이 없으니, 온실을 지을 자본이 없었다. 그러나 간절하면 통하는 것이 또 세상이 이치가 아니겠나. 이리저리 찾아보다 조상의 지혜에 기대어 온실을 짓기 시작했다. 쇠가 귀하던 시절에는 나무로 온실을 지었다고 했다. 마침 마을 산에는 대나무가 많았다. 산에서 대나무를 베어 농토에 작은 온실을 만들었다. 비탈에 의지해 지은 온실은 땅의 온기를 축적하고,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은 막아주는 근사한 설계였다. 하지만 경험이 없는 이론은 빈약한 법이다. 첫 번째 온실은 그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바람에 대나무가 부러지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또 직파로 고추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건 망하기 위해 농사짓는 것과 같았다. 다시 마음을 일으켜 세워 온실을 짓기 시작했다. 요번에도 무너지면 올해 봄은 지나간다. 더 튼튼하게 짓기 위해선 온실이 더 작아져야 했다. 필요한 면적이 있으니 작은 온실 두 개를 짓기로 하고 조금 더 근사한 나무들을 구해와 골조를 세우고, 대나무로 살을 붙였다. 다른 하나는 흙으로 축대를 쌓아올리고 땅속으로 파고들어가 나무 사용을 최대한 줄였다. 그렇게 지은 6평짜리 온실 두 동은 무너지지 않았고, 그 해 모종은 두 동의 온실에서 건강하게 자라났다.


고추농사는 밭에서 짓는 농사 중 제일 오랜 시간 키우는 농사중 하나일 것이다. 2월 초에 온실에서 키우기 시작한 고추는 10월 중순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 이어진다. 긴 시간이 들어가는 만큼 신경 쓸 것도 들어갈 정성도 많다. 그래서 어른들은 고추농사가 농사 중에 농사라고 하나보다. 지금은 3년차에 지은 두 동의 작은 온실에 50평 남짓 하는 온실을 하나 더 지어 모종농사를 짓는다. 이제는 2월의 온실농사가 제법 익숙하다. 하지만 더 잘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올해는 조금 더 좋은 모종, 튼튼한 모종을 키워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