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밭을 만들던 때가 생각났다. 필요한 것은 삽 한 자루가 전부였다. 비바람에 평평하게 가라앉은 흙더미를 한 삽씩 퍼 올려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다. 군대 다녀온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삽질 하나만큼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다 자부했다. 하지만 흙일의 고됨을 깨닫는데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땅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넓다. 삽으로 하루 종일 만들어낸 밭이 50평이 넘지 못했다.
할머니들은 밭을 만드는 다른 도구가 있었다. '쇠스랑'이라는 물건이었다. 생긴 것은 꼭 괭이처럼 생겼지만 괭이 날이 있는 자리가 포크처럼 생겼다. 작은 밭을 일구시는 할머니들은 이 쇠스랑으로 흙을 뒤집고, 거둬 올려 밭이랑을 만들었다. 맨 처음 삽을 사용하면서 쇠스랑을 사용해 보았는데 허리가 너무 아팠다. 안 쓰던 도구로 작업을 하려니 손에 익지를 않고 매 동작이 거슬렸다. 그 뒤로는 한 쪽에 밀려나 쓰지 않았다. 다음 해, 경작하는 전답의 면적이 1,500여평 정도로 늘었다. 삽으로는 부족했다. 다시 쇠스랑을 꺼내들었다. 옛 농서들에 보니 일이 익은 농군이 쇠스랑으로 하루에 200평 정도의 땅을 간다고 했다. 삽 보다는 쇠스랑을 몸에 익히는 것이 더 빠른 길이다. 그 뒤로 3년 정도 쇠스랑을 사용하니 몸에 익어 하루 종일 하면 100평 정도는 밭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삽과 쇠스랑만으로 8년을 땅을 갈았다. 더 큰 기계들을 살 돈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몸을 써서 밭을 일구는 것이 재미있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과 숨소리, 벌레들과 새 지저귀는 소리까지 들리는 고요함이 좋았다. 흙일에 몸이 노곤 해질 때 면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에 허리를 펴고,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는 시간도 마음에 들었다. 흙을 타고 들어가는 삽날의 느낌과 흙을 뒤집으면서 나는 특유의 소리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삶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기엔 엄혹한 것이다. 농사로 생업을 가꿔야 하니 몸으로만 땅을 일궈서는 택도 없었다. 가족이 생기고, 아이들이 하나 둘 커가면서 농사만 하기엔 하루가 너무 짧았다.
시간이 부족했다. 기계의 힘을 빌어 부족한 시간을 매우기 시작했다. 낫으로 베던 풀은 예초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삽으로 쇠스랑으로 만들던 밭고랑을 트랙터와 관리기를 사용해 만들기 시작했다. 기계들은 농업기술센터에서 저렴한 가격에 임대가 가능했다. 처음 트랙터를 사용한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돌이 유독 많아 삽이 들어갈 틈이 없던 400여평의 비탈 밭을 하루 만에 갈았다. 땀은 흐르지 않았고, 밭은 풀 한 포기 없이 깔끔해졌다. 기계의 굉음이 온 산골을 덮었고, 바람소리도 새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소리와 감촉을 잃었고, 댓가로 시간과 육신의 체력을 받았다.
트랙터를 기술센터에서 빌려가며 2년 정도 농사를 지었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기계는 자주 고장 나고, 원하는 때에 빌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초보자가 자신의 힘으로 넓은 밭을 갈 수 있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올해에는 유독 더 기계가 자주 고장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덕분에 밭은 때를 놓쳐 흙이 거칠거나 작물의 자람새가 들쭉날쭉 하였다. 내 기계가 없으면 농사짓기가 쉽지 않다고 마을 어른들은 만날 때마다 말씀하셨다. 이제 때가 온 것인가. 내 기계를 가지고, 원하는 날에 땅을 갈고, 밭을 만들어, 딱 좋은 날 심는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인가.
6월의 한가운데 어느 날, 결국 기술센터에 마지막 남은 트랙터가 고장 났다. 기계가 고쳐지길 기다리며 또 때를 놓치면, 가을 농사도 신통치 못할 것이 자명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기계를 다룰 줄 알게 되었고, 작물을 심고 거두는 것의 때를 대략이나마 알게 되었고, 어디서 기계도 빌릴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나의 트랙터를 가지고 좋은 날을 정해 밭을 만드는 모습을 그려봐도 되지 않나 싶었다. 며칠의 고민 뒤에 결심이 섰다.
결국 집의 기둥뿌리를 하나 뽑아 트랙터를 샀다. 꼬박 이틀을 돌아다니며 김제에서 25년 된 중고트랙터를 하나 받아왔다. 다행히 마을에 농사짓는 어른이 기계를 산다고 하니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 중고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 지, 어떤 기계가 쓸 만한지, 가격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모르는 것이 많았다. 기계를 들여놓으니 보인다. 어른들이 아직 농사짓고 계실 때 기계를 장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카탈로그와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실전지식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농사는 경험의 전승이라는 말이 다시금 와 닿았다.
우리 집에 온 트랙터는 다음 날 논을 갈았다. 1,000평을 일구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운전석에서 바라보는 논밭의 풍경은 두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바라보는 시선과는 완전히 다르다. 같은 땅인데 이다지도 다르다. 다시 쇠스랑으로 밭을 만드는 날이 돌아올 수 있을까. 아이들이 크고 가세에 여유가 생기고 나면, 편리에 몸이 젖어 다시 삽을 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