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맘때가 되면 봄, 여름 농사를 돌아본다. 모종과 배추, 마늘과 생강은 작년보다 품질도 생산도 좋아졌다. 하지만 쌀과 들깨, 고추와 수박은 심었다는 말도 못할 정도로 죽을 쒀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5할 농사꾼은 된다. 처음 농사를 시작하던 때에 비하면 참 훌륭한 성적이다. 실패도 경험이라 내년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니, 망한 농사도 내년이 되면 올해보다는 반드시 좋아진다. 그렇게 보면 나아질 것만 남았다. 하지만 농사는 인류가 가장 오래 지속한 직업 중 하나이다. 이 업계는 이미 수십 년의 경험이 쌓인 고인물들만 남아 십중팔구의 농사 성공을 보여도 썩 잘 짓는 사람은 못 된다. 풍문에는 농군이란 부지깽이를 심어도 열매를 단다고 했다. 5할은 동네어른들에겐 땅을 한 해 놀린 정도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회하려면 가을이 와도 쉴 틈이 없다.
올해도 여지없이 여름엔 역대급 더위와 폭우가 왔고, 야생동물은 불도저처럼 논밭을 밀어버렸다. 여름농사가 시원치 않으니 대안을 찾아야 한다. 밖에 나가 품일이라도 해볼까 싶다가도, 품일 하는 시간에 한 삽이라도 논밭을 일궈야 농사기술이라도 익히지 않을까 싶어 아침마다 밭으로 나간다. 너멍골이 위치한 완주군 고산면은 마늘과 양파가 유명한 고장이다. 예부터 땅과 기후가 마늘과 잘 맞아 오랫동안 가을농사가 주된 농사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다들 가을농사를 하는 땅이니 산골에서도 뭐라도 심으면 반절이라도 거두지 않을까. 올해는 너멍골에서도 가을농사에 힘을 실어보기로 했다.
보리, 밀, 마늘, 봄동까지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 20일정도가 우리 집 가을농사의 대 농번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다. 매일매일 노동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짜고, 중간에 휴식시간도 꼭 안배한다. 휴식이 양질의 노동을 만든다. 쉬는 것은 몸을 놀리는 농사에서 꼭 필요한 작업의 정수이다. 아침공기가 차다. 반소매를 입고나가기 부담스러워 지면, 가을농번기의 출발신호가 울린 것이다.
봄동을 심는 것으로 가을농사는 시작된다. 이틀간 200여 평의 밭에 열심히 봄동 모종을 옮겼더니 이번엔 고라니가 새순을 뜯으러 온다. 하룻밤 새 7줄 중 2줄을 먹어버렸다. 하지만 여유분의 모종을 키워놨으니 걱정 없다. 항상 실수하고, 예상하지 못한 피해에 시달리다보니, 나중에 버리더라도 모종은 넉넉하게 준비한다. 추가로 봄동 모종을 심고, 급하게 고라니 방지망을 보수한다. 다행히 고라니 공께서는 선비시라 간단한 울타리 정도면 가던 길을 돌려 산으로 올라간다. 봄동 밭을 정비하는데 3일을 소비했다. 예상보다 길어졌지만 나쁘지 않은 기록이다.
다음은 보리밭으로 간다. 보리는 벼와 이모작을 하기에 특히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벼는 물을 넣어야 하고, 보리는 물을 빼야한다. 너멍골의 논들은 물이 솟는 수렁논이다. 물이 마르지 않아 밥맛이 좋지만, 물이 빠지지 않아 수확이 힘들고, 보리농사에 공을 많이 들여야 한다. 올해는 멧돼지 야차들의 습격이 유난한 해였다. 논들도 그 요괴들에게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올해는 논둑을 그렇게 건드려 놨다. 논둑을 다 허물고, 물길을 막아 수렁을 더 심하게 만들었다. 삽으로 복구하면 족히 한 달은 삽질에만 매달려야 할 판이다. 그러나 걱정이 없다. 요 근래 폭우가 잦아져 복구에 쓸 요량으로 받아둔 굴착기 면허가 있기 때문이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소형 굴착기를 빌려와 작업을 시작한다. 멧돼지가 메워놓은 배수로를 다시 파내고, 수렁에 물이 들지 않게 둑을 세운다. 멧돼지가 내년에는 좀 덜 타게 울타리를 세워야 하니, 둑은 크고 넓게 잡는다. 야차들의 만행을 약간이나마 수습하는 데만 굴착기로 5일이 꼬박 걸렸다. 삽으로 했으면 아마 내년 봄이 왔으렷다. 맹수 없는 산골의 왕인 멧돼지의 힘에 다시금 탄복한다. 이제 일주일 정도 물이 빠지길 기다리며, 다음 밭으로 이동한다.
다음은 마늘이다. 마늘은 이 지역의 토종마늘을 매년 심어왔다. 비닐피복을 하지 않는 농법으로 시행착오를 많이도 겪었다. 7~8년쯤 하다보니 이제 감이 조금은 생긴다. 올해는 마늘 씨알이 제법 굵어 사람들에게 팔 때 면이 좀 섰다. 한 번 얄팍한 성공을 맛보고 나니, 작년에 했던 농사방법 이외에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꺼려진다. 그렇게 성공의 경험이 쌓이면, 일과는 고착되어 쉽게 변하려하지 않는다. 다시금 농사에서 실패의 경험이 참 중요하다고 느낀다. 젊어서 고생은 꿔서라도 하는 것이라니, 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지금 장렬하게 도전과 패배를 맛봐야 한다. 자식들이 더 자라면 마음속 용기의 씨가 말라, 새로움이란 단어만 들어도 물러서는 날이 올 것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밀밭을 갈무리하고, 밀을 심으면 너멍골 가을 농번기가 끝이 난다. 밀을 심기 전에 들깨 밭과 생강 밭의 무너진 배수로를 정비하고, 울타리도 보강해야한다. 올해 가장 야생동물의 피해가 심했던 밭이다. 마음 같아선 성벽이라도 쌓고 싶지만 호주머니가 얇으니 일단 조금더 튼튼한 울타리로 보강한다. 내년에는 올해 망한 값까지 치러 이 밭에서 밀알이 강물처럼 흘러 통장에 차곡차곡 들어와 쌓이면 좋겠다.
하늘은 광활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농사의 무게에 눌려 고개가 숙여질 때쯤이면, 가을이 와서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조금 더 힘내면 올 한 해도 지나갑니다.’라며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고맙다. 숨 한 번 크게 쉬고, 올해의 마지막 농번기를 열심히 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