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멍굴 포레스트    2025.12월호

겨울의 미덕


진남현 청년농부




집 앞에 심은 은행나무에 낙엽이 지기 시작한다. 은행나무는 느리게 자란다더니 5년이 지난 지금도 작은 아기나무이다. 그래도 한 해를 또 자라 노랗게 익은 낙엽을 본다. 따뜻해진 날씨에 단풍은 늦게 피어 일찍 지지만 그래도 아름다움은 예년에 결코 못지않다. 마당에도 산에도 단풍이 다 지고 나면 이제 겨울이 시작된다. 춥고 황량한 이 계절 덕에 쉼을 모르는 농사꾼들은 달콤한 휴식기를 가진다. 휴식에도 도가 있으니, 이 쉼표를 잘 찍는 것이 농촌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늘을 향해 무섭게 자라나던 풀들은 찬바람에 모두 유명을 달리했다. 풀이 죽으면 아래에는 그의 뿌리가 움켜잡고 있던 흙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매서운 겨울바람에 곱고, 양분이 많은 흙들은 다 날아 가버리고, 거친 자갈과 모래만 남는다. 이 고운 양분들이 날아가지 않도록 겨울이 오면 흙을 무언가로 잘 덮어줘야 한다. 내가 경작하는 농토는 넓은 땅에는 보리나 밀을 심고, 또 잘 부숙된 낙엽들을 모아 흙을 덮어준 땅에는 마늘을 심는다. 그렇게 하면 일단 흙이 날아가지 않게 작물들과 낙엽이 잡아주게 된다. 이렇게만 두면 좋겠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연말이 되면 잘 부숙된 퇴비와 낙엽을 한 번 더 땅에 덮어준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서 땅을 덮어주면 땅 속의 미생물들이 집을 만들고, 낙엽과 퇴비가 썩으며 흙을 지킨다. 이렇게 하면 겨울을 나는 작물들이 추위에 얼어죽지 않는다. 또 양분을 보존한 땅만이 내년 봄이 왔을 때 새로운 생명들을 품고 기를 수 있으니, 땅이 잘 쉬게 만드는 것이 한 해 농사의 마지막이자 시작이다. 


올해 유독 손을 많이 다쳤다. 연초 작업 중에 한 번, 지난달에도 콤바인으로 나락을 털다 손가락이 상했다. 그 덕에 쉬었지만, 농사라는 것이 다 때가 있는 것이라 시기를 놓쳐 몇 가지 작물 농사에 아쉬움이 남았다. 왜 다쳤을까. 돌아보면 결국 내가 나를 잡아먹은 것이다. 일은 많고 시간은 없으니, 휴식 없이 몰아치고, 그러다 보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몸이 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머리로는 그만한다 말하지만 몸은 쉬지 못한다. 이제 정말 쉬는 법을 익혀야 한다. 운 좋게도 두 번은 손가락이 멀쩡히 붙어있었지만, 다음번에는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내년에는 몸이 주는 교훈을 배워 고쳐야 한다. 겨우내 지친 몸을 푹 쉬면서 어떻게 하는 노동이 몸도 견디고, 마음에도 차는 농작업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있다. 


하루가 짧으니 쉬는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 아침에 일어나 아이들이 등원하기 전에 한바탕 놀아주고, 잠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일 할때도 지는 해가 그리도 붙잡고 싶었는데, 쉬는 날의 태양은 더 빨리 흐른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는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가. 역시 지나친 휴식은 잡념과 무기력을 불러온다. 올해 겨울에는 산에 오르기로 했다. 뒷산은 나무가 작고, 양지바른 돌산이라 칡이 자생한다. 그래서 칡을 캐다 즙도 짜먹고, 나태해진 몸둥아리도 깨울 겸 산에 오른다. 올해는 큰 칡을 좀 캐려나. 겨울의 초입에 기대가 많다. 


농사를 지으니 겨울 동안 중요한 숙제가 생긴다. 농번기 동안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밀린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다. 농사라는 직업은 봄이 오고, 가을까지는 해가 뜨면 논밭에 나가 해가 져야 돌아온다. 또 저녁에는 몸을 쉬게 한다는 핑계로 밥숟가락 내려놓으면서 잠이 든다. 겨울이 오고 보니 둘째가 벌써 기저귀를 때고,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정말 빠르다. 어른들 말씀이 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더니 정말 맞다. 조금이라도 더 눈 마주치고, 웃고 놀며 휴식기를 보낸다. 밀린 숙제를 하려니 겨울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낙엽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휑한 산을 보고 있으면, 저기가 몇 달 전에 멧돼지가 나온다며 쏘아보던 그 산이 맞는가 싶다. 칼바람에 사람만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래 모든 산천초목이 움츠러들어 있다. 모두 잘 웅크려 있다 내년을 도모하는 것이다. 농사꾼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이라, 산처럼 내처럼 푹 쉬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그래야 내년에도 힘차게 살아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