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마당 인문의 숲 ⑥   2026.1월호

그들의 죽음’이 아닌, ‘우리의 죽음’입니다

법의학자 이호


작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를 집필하며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되뇌었다고 한다.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지막 삶을 비추고 우리 공동체가 놓친 위험을 증언하며, 남겨진 이들에게 더 안전한 미래를 선물하기도 한다. 올해 마지막 ‘인문의 숲’ 강연 현장, 죽은 자의 흔적을 통해 삶의 가치를 일깨우는 법의학자 이호를 만났다. 12월 18일 저녁, 청중들과 함께 나눈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를 문화저널 독자들에게 전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밝혀지기까지  

생과 사가 무 자르듯이 명확하게 나누어질까요? 죽음과 삶은 언뜻 경계가 명확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중환자실에서 연명 치료를 받는 분들을 보면, 숨은 쉬고 있지만 삶을 영위한다고 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저는 죽음이 단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종이에 잉크가 물들어가는 것처럼 서서히 삶에 스며드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에오스라는 여신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청년 티토노스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간청합니다. 하지만 '늙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잊었습니다. 결국 티토노스는 죽지는 않지만 계속 늙어갔고, 나중에는 팔 하나 들 힘도 없이 신음만 내다가 땅에 묻혀 매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이 없는 삶이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요? 오늘은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제가 하는 법의학은 법정에서 의학적 소견을 전달하기 위한 학문입니다. 의대에서 인턴을 마쳤다고 바로 법의학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병리 전문의 과정을 거쳐야 하고, 그중에서 다시 "나는 시신을 볼 거야"라고 마음먹는 이상한 사람이 10년에 한 번쯤 나타나 법의학자가 됩니다. 흔히 죽은 사람만 다룬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가끔은 산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상처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에 남은 흔적을 분석해 아동 학대나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는 일 또한 법의학의 중요한 영역입니다. 


제가 부검실에서 차가운 시신을 마주하기 전까지, 그 앞단에는 수많은 동료의 헌신이 있습니다. 구급대원, 경찰, 그리고 시신 수습을 위해 차가운 물속에 뛰어들거나 시커먼 잿더미를 뒤지는 과학수사 요원들입니다. 이분들이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모든 기록과 서류를 완결해 가져올 때, 저는 비로소 부검실에서 그 시신을 처음 대면합니다. 


법의학뿐만이 아닙니다. 뼈 한 조각으로 키와 나이를 추정하는 법인류학자, 치아 기록으로 신원을 확인하는 법치의학자, 시신에 꼬인 구더기를 키워 사망 시각을 추정하는 법곤충학자도 있습니다. 검시관과 법의 간호사까지 모두가 팀워크를 맞추어야 비로소 한 사람의 죽음이 온전히 설명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는 이들의 노고를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




죽음의 '육하원칙'을 완성하는 일    

피터 브뤼겔의 <이카루스의 추락>이라는 그림을 보면, 정작 주인공인 이카루스의 발과 흩날리는 깃털은 구석에 겨우 보입니다. 누군가 비극적으로 죽어갈 때도, 누군가는 평온하게 낚시를 하고 농사를 짓습니다. 죽음은 흔히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으로 나뉩니다. 나의 죽음은 스스로 경험할 수 없고, 너의 죽음은 상실의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보통은 나와 무관한 이들의 사고를 '그들의 죽음'이라 부르며 지나치곤 하지요. 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공동체의 위험과 병폐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그들의 죽음'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그것을 '우리의 죽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매년 사인을 모른 채 사망 신고가 되는 분들이 2만 8천 명에 달합니다. 이분들은 대개 홀로 살거나 사회적 기반이 없는 취약 계층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무명(無名)의 죽음들을 분석해야 우리 사회의 진짜 아픈 곳, 진짜 취약점이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성추행 사건으로 사망한 공군의 고 이예람 중사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 아이 때문에 사회가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 사람 덕분에 내가 살 수 있었다'고 기억해 주길 바란다." 유가족이 "살려내라"고 외치는 것은 시신을 되살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죽음을 잊지 말고,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을 우리 공동체가 기억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사인은 익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사인을 넘어 '침몰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육하원칙을 완결해 주는 것, 그것이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육하원칙이 완성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던지는 교훈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참사가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쉽게 '범인'을 찾습니다. 세월호 당시 가장 먼저 구조에 나섰던 해경 정장은 2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파면당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때 떨리는 손으로 브리핑하던 소방서장도 가장 먼저 조사를 받았지요. "너만 신속했다면", "네가 빨리 판단했다면"이라며 '너'의 책임을 묻습니다. 하지만 먼저 나선 사람에게 '독박'을 씌우는 사회에서 앞으로 어떤 공무원이 기꺼이 헌신하겠습니까? 공동체의 안전망을 지키려면, 이들의 실수를 파헤치기 전에 그들이 다한 최선의 노력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세월호 현장에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들을 마주했습니다. 구명조끼를 꽉 조여 입은 채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아이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도 승객들은 유독가스 때문에 폐가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믿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태원 참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놀러간 것이 죄입니까? 이들은 국가와 사회를 믿었던 선량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아픔에 등 돌리고 "왜 거기 있었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간성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공감'이라는 단어를 설명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공감이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공명'하는 것입니다. 악기들이 서로 진동수가 같을 때 소리가 커지는 것처럼, 누군가 울 때 곁에서 함께 울어주는 마음이 공명입니다. 비록 함께 울어주는 것이 슬픔을 증폭시켜 더 아프게 느껴질지라도, 고통받는 이의 눈물에 공명하는 사회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드린 이 이야기들이 우리 곁의 죽음들을 '우리의 죽음'으로 바라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