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마당 인문의 숲 ③ 소설가 신경숙   2026.6월호

기억은 문학이 되는 순간 비로소 나를 떠나갑니다




마당의 ‘인문의 숲’ 세 번째 강연의 주인공은 소설가 신경숙이다. 첫 장편소설인 『깊은 슬픔』을 비롯해 『외딴방』, 『엄마를 부탁해』, 『풍금이 있던 자리』 등을 통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은 그는 ‘기억은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를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5월 14일 저녁, 전주 공간봄에서 열린 자리. 작가에게 기억이란 곧 글쓰기의 원천이다. 그의 문학은 언제나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떤 기억들의 그의 문학으로 되살아났을까.




‘기억’은 언제나 현재로 거슬러 온다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시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갖고 있다.’ 20대 시절 이 글을 읽었을 때 굉장히 큰 울림이 다가왔어요. 그런데 이 말은 과연 보들레르만의 이야기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기억’이라는 것에 의지해 자기를 펼쳐나갑니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경험한 것들, 나만 알고 있는 어떤 공간과 시간, 추억들이 우리의 몸속, 정신 어딘가에 스며들어 있죠. 그게 언제 튀어나올지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 어떤 기억이 문학이 되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아쉬웠던 것, 내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것,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문을 닫아버린 것, 잘하고 싶었으나 결국은 내가 배반했던 것. 저는 이런 것들이 기억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살아나 언어로 재탄생되는 경험을 해요. 


서른이 되기 전 냈던 책 중 『풍금이 있던 자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책의 첫 문장이 저한테 왔어요.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막 봄이 와서, 여기저기 참 아름다웠습니다.’라는 문장입니다. 어린 시절 봤던 풍경들이 서른 무렵의 저에게 문득 들어온 거예요. 당시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아주 삭막한 곳에 자리한 아파트였지만, 그곳에 앉아 쓰고 있는 배경은 어린 시절 봤던 아름다운 봄 풍경이었다는 것. 


그때 처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억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어떻게 거슬러 올라와 한 인간의 현재에 작용하는가.’ 여기서 또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마치 직선에 놓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둥그런 원 같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라 부르는 시간은 오늘에 비춰서 생각한 것일 뿐, 사실 한 인간이 살아내는 시간들은 둥그런 원이어서 서로 순환하며 흘러가는 것 아닐까. 어린 내가 봤던 그날의 빛, 봄날의 풍경, 파란 대문,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 그때 그 평화로운 기억은 고통과 갈등을 겪는 현재의 ‘나’를 지켜줍니다. 저에게 ‘기억’은 언제나 현재로 거슬러 올라오는 존재. 그렇기 때문에 글 속에서도 늘 작용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집으로 가자, 낯선 곳에서 솟아오르는 문장에 떠밀려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글쓰기란 나에겐 집이었을까. 내 속을 뚫고 올라오는 문장들은, 

그 순간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나를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외딴방』에서





외면해 온 시간과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 

『외딴방』은 열여섯 살, 고향인 정읍을 떠나 스무 살이 되기 직전까지의 시간들을 쓴 책입니다. 정말 메모 한 장 없이 썼던 작품이에요. 제 가슴속,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글이죠. 서른둘쯤의 화자는 ‘16년 전’이라고 표현되는 시간, 그러니까 16살에서 20살까지의 시간을 자꾸만 돌아봅니다. 작품 속에서 과거는 현재형으로 쓰이고, 현재는 오히려 과거형으로 쓰였어요. 이러한 문장 형식을 사용한 이유는 과거가 그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지점을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과거가 현재에 와서야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언젠간 두 시간이 만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요? 


이 작품은 제가 작가가 되고나서 10년쯤 지나, 고민이 많던 시기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고등학교 친구한테서 처음으로 전화가 왔어요.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네가 쓴 작품을 다 찾아서 읽어봤다. 그런데 너는 우리 이야기는 쓰지 않더구나.” 그러면서 “혹시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는 건 아니냐.” 이런 말을 했어요. 참 아픈 말이기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을 못하겠는 거예요. 어색하게 전화를 마무리하고 그날부터 저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어요. 내가 어떤 시간은 정면으로 바라보길 피하고 있었구나. 마치 유리창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처럼 시간과 내가 섞이지 않고, 관찰자처럼 바라만보고 있었구나! ’이런 마음으로 계속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서부터 쓰기 시작한 작품이 『외딴방』이었어요. 친구에게 답이 되길 바라며 쓴 것이기도 하지요.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쓰였습니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 책이 나오고 나서 한동안은 이게 자전소설이냐 아니냐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냥 놔두었죠. 30년이 흐른 지금도 누군가 “그래서 이 소설은 자전소설인가요 아닌가요?” 물으면 저는 그냥 “소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자전소설이라 정의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이상한 경계가 바로 문학의 매혹이지요. 


엄마를 위한 글을 쓰겠다는 나와의 약속

『엄마를 부탁해』라는 작품도 독자들이 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엄마는 결국 살았나요, 어떻게 된 건가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해요. 만약 그 작품을 읽고 자신의 엄마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엄마를 찾은 겁니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구나. 우리 엄마도 다른 엄마의 뱃속에서 열 달쯤 웅크리고 있다가 세상에 나와 작은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걸음마도 배운 그런 사람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다면 그건 엄마를 찾은 것이죠.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고요. 이 세상엔 좋은 엄마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엄마라고 표현하니 이상하기도 한데요. 결국 결말은 스스로가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우리 엄마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며 전화 한번 걸어볼 수 있다면 그건 엄마를 찾은 것이라고. 그렇게 답해주고 싶어요. 




         




『엄마를 부탁해』는 어떻게 보면 『외딴방』과도 묘하게 결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외딴방』의 장면 중 엄마가 여름밤 모내기를 마치고 어린 딸과 외사촌을 서울에 데려다주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때를 떠올려보면, 엄마는 온종일 모내기를 하시고 또 캄캄한 밤 딸을 데려다주기 위해 기차에 올랐으니 얼마나 고단하셨겠어요. 그때 꾸벅꾸벅 조는 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도시에 가면 언젠가는 작가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엄마에게 바치는 글을 써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만이 고단한 엄마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줬어요. 


그리곤 작가가 되어 많은 작품을 썼는데 『엄마를 부탁해』를 쓰는 일은 너무 벅찼습니다. 그만큼 엄마라는 존재는 저에게 알 수 없는 존재였어요. 해독이 잘되지 않는 아주 두꺼운 책 같은 존재가 엄마구나. 섣불리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덮어놓고 다른 작품을 쓰곤 했는데, 어느 날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이 불쑥 찾아왔어요. 첫 문장을 쓰고 나니 그렇게 애를 먹었던 문이 쉽게 열리는 거예요. 문이 열리자마자 밖에 있던 물이 범람하고 휘몰아치면서 이야기가 막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릴 적 나 혼자만 알던 약속을 지키게 해준 작품이 되었죠. 책의 맨 앞장에는 음악가 리스트의 말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라는 문장을 붙여놨습니다. 어떤 이유도 없이, 숨이 붙어 있는 한 사랑할 수 있으면 다 사랑하는 게 좋겠다. 그것 외에는 답이 없는 게 살아가는 일 같다고. 『엄마를 부탁해』를 쓰던 시절 그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나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의 기억이 되는 일

열여섯의 나, 점점 가까워져오는 버스의 불빛에 조급해져서 아버지! 외친다. 상점에서 아버지가 뛰어나오는 것과 버스가 와서 멈추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아버지, 나, 가요! 열여섯의 나는 아버지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하고 버스에 오른다. 얼른 버스 뒤로 가서 차창으로 바깥을 내다본다. 아버지가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실루엣만 우두커니 서 있다.

─『외딴방』 중 


아버지와 작별했던 이 기억이 저에게는 참 오랫동안 남아있어요. 멀리서 버스는 오고, 아버지는 저기서 나오고, 저는 급히 손을 흔들고, 아버지는 우두커니 서있고, 유독 오래오래 남아있는 이 기억은 지금의 제가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작용을 해요. 누군가와 헤어질 때 저는 그 사람이 멀리 안 보일 때까지 바라봐요. 혹시나 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제가 아직 서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때 그렇게 헤어졌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렇겠지요. 지금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는데도 가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때 그 모습이 떠올라요. 버스 차창 밖에 황망하게 서있던 모습. 이런 강렬한 기억들이 저에게는 문학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억이라는 건 온전히 내 것이지만, 그게 문학 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더 이상 제 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선이기도 하고, 나로부터 시작됐지만 결국은 그들의 것이 될 수도 있죠. 그러니 기억이 문장이 되어 문학작품으로 들어가고 나면 이제는 내 기억이 아닙니다. 제 안에 있는 기억들은 그렇게 작품으로 재탄생하면서 비로소 나를 떠나가는 것 같아요. 떠나가면서 다른 모습으로 구성이 되고, 또 읽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 다른 형태를 갖고 나아가겠지요. 






신경숙

정읍에서 태어나 1985년 '문예중앙'에 소설 「겨울우화」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첫 장편소설 『깊은 슬픔』을 비롯해 『외딴방』, 『엄마를 부탁해』, 『아버지에게 갔었어』 등 인간 내면을 향한 깊은 시선을 담은 다수의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정리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