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25.2월호

손짓으로 농인들의 삶을 지켜온 사람

수어통역사 최현숙


최현숙




2월 3일은 '한국수어의 날'이다.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된 2016년 2월 3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그동안 수어는 독립된 언어가 아닌 한국어의 보조 수단 정도로 여겨졌지만, 수어법이 제정되며 한국어와 동등한 자격을 가진 농인의 공용어로 인정받았다. 한국수화언어법에는 농문화, 농정체성, 한국수어의 보급 등 많은 내용이 포함되며 법이 제정된 2016년은 농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10여 년이 지났다. 무언가 많이 달라져 있을 줄 알았지만, 안타깝께도 현실은 그대로다. 수어나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들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말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다.


전라북도에는 1만 5천 여명의 농인이 살고 있다. 그들과 동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평생을 바친 사람이 있다. 수어통역사 최현숙 씨다. 40년 넘게 농인들의 곁을 지켜온 그는 올해 2월 퇴임을 앞두고 있다. 배리어프리 등 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절실해진 시대, 오직 한길, 수어통역으로 살아온 그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농인들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터뷰는 한 차례 미뤄졌다. 그가 폭설로 고립되어 있는 한 고령의 농인을 만나러 급히 순창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농인의 집에 도착했을 때 눈은 허리께까지 쌓여 있었단다. 군청의 제설 담당자와 한참 동안 눈을 치우고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청인들은 수어통역사를 대개 뉴스 화면을 통해서만 접하지만, 그들의 실제 업무는 농인들의 일상을 지키는 매우 광범위한 일이다.


최 씨는 수어통역사 1세대다. 수어통역사가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식되기도 전인 1984년부터 한국농아인협회 전북지역 실장으로 일하며 농인들과 만났다. 그는 통역사 뿐 아니라 동시에 수어를 가르치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원광보건대에서 사회복지과 학생들에게 수어를 가르치고 있다.




최현숙 씨와 동생. '사랑해'라는 뜻의 수어를 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주에 전국 최초로 수어통역센터가 설립되고, 전북에서 한국수화언어 지원 조례가 만들어진 중심에 그가 있었다. 많은 성과로 수어통역사들에게 맏언니로 통하고 있는 그가 수어를 배우게 된 데에는 농인 여동생이 있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동생은 밖에 나오지 못하게 했어요. 동생을 부끄러워했던 못난 언니가 빚진 마음을 갚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그 빚을 다 못 갚은 것 같은데 벌써 40년이 흘렀네요. 


그의 핸드폰에는 수어통역을 의뢰하는 연락이 끊이질 않는다. 현재는 동료가 늘어나 사정이 나아진 편이지만 한때는 병원 응급실과 소방서의 벽면에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농인이 법원에서 재판을 받거나 경찰 조사를 받을 때에도, 결혼하거나 장례를 치를 때에도 그가 동행했다. 최 씨는 수어통역사를 농인들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농인 임산부가 출산하는데 아기가 위험한 상황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분만실에도 들어갔습니다. 언제 호흡해야 하는지, 언제 힘을 주어야 하는지, 아기는 얼마나 나왔는지 이런 것을 제가 다 통역했어요. 덕분에 결혼을 하기도 전부터 출산에 대한 지식이 많았죠.


그는 축구 심판과 지도자 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전북농아인축구팀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축구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농인들과 함께 뛰는 것이 즐겁다는 마음 하나로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한참 성적이 좋을 때는 선수들과 함께 외국으로 원정 경기를 가기도 했다. 아쉽게 전국대회 우승을 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 것이 지금도 미련으로 남는단다.







아직도 갈 길 먼 수어통역 

센터에 있던 한 젊은 수어통역사는 최 씨를 자신의 유치원 원감 선생님이었다고 소개했다. 그가 농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운영했던 늘봄 새마을 유아원의 이야기였다. 농인들의 자녀는 부모와의 대화로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는 것이 어렵고, 대게 수어를 함께 학습한다. 맞춤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1986년 유아원을 개원했다. 8년 뒤 여러 사정으로 문을 닫아야 했을 때는 남몰래 많이 울기도 했다. 


그의 지난 40년은 농인들을 위한 운동의 연속이었다. 한때는 일부러 농인인 척 택시를 타기도 했단다. 필담으로 행선지를 보이면 기사는 '아침부터 장애인 손님이라니 재수가 없다'고 했다. '장애인은 택시비를 깎아달라고 우기기라도 하느냐'고 대답하면 들리지 않는 사람인 줄 알고 한 말이라며 뒤늦게 사과했다. 


전북 지역의 방송국에 수어통역 뉴스를 제안한 것도 그다. 농인들도 알권리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요청 덕분에 1992년 지역 방송국 중에서는 최초로 전주KBS에서 수어통역을 시작했다. 화면 보기에도 벅찬데 왜 수화를 함께 보여주느냐는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지만 그 뒤 뉴스의 수어통역은 자리를 잡았다. 


2022년에는 전북민주언론시민연합과 한 걸음 더 나아간 방송을 만들었다. 선거방송토론회에서 한 명의 수어통역사가 방송 전체를 책임지는 것이 아닌, 사회자와 후보자 모두에게 각각의 통역사를 배치했다. 화면 크기 또한 후보자와 수어통역사를 동일하게 구성했다. 아쉽게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20년 전 그랬던 것처럼 그는 노력하면 바뀌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언젠가 우연히 외국의 뉴스 화면을 보는데 아나운서와 수어통역사가 같은 크기로 나오더라고요. 한국처럼 왼쪽 하단에 작게가 아닌 오른쪽 상단에 있는 경우도 있고요. 사실 지금 한국의 수어통역은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요. 사회가 수어통역을 진심으로 대하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현재 전주시수어통역센터에는 7명의 수어통역사가 근무 중이다. 턱없이 부족한 인력에 많은 수어통역사의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다. 그는 희생과 봉사의 정신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듯한 사회적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표준 통역비가 책정된 지 오래임에도 재능 기부를 원하는 연락이 많다. 퇴직을 앞두고 후련한 마음보다는 후배들이 걱정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퇴직 후 당분간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에 전념할 예정이다. 언젠가 충분히 쉬었다는 생각이 들면 농인들만을 위한 요양원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일반 요양원에 들어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홀로 살아가는 고령의 농인들이 많다. 도내 최초로 수어통역사가 상주하는 요양원이 만들어지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