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25.4월호

맞서지만 외롭지 않게, 연극이라는 이름으로

연극인 정상순




연극인, 에코 페미니스트 등 그를 설명하는 단어는 많다. 별명은 '똥폼'이다. 술자리에서 분위기가 무르익을만하면 벌떡 일어나 집에 자주 가는 그에게 연극인 후배가 지어주었다. 완전한 폼은 못잡고 어딘가 2프로 부족한 자신과 잘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설명하는 사람. 연극인 정상순 씨를 남원 시내에서 만났다.


서울에서 연극을 하던 그는 2002년 서른두살의 나이로 돌연(?) 산내에 왔다. 하고 싶은 말은 연극으로 한다는 그는 주로 여성, 동물권, 장애 등을 이야기한다. '월간 정상순'을 통해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을 하고, 마을 극단 '떼아르뜨 마고'의 대표로서 산내 사람들과 연극을 올린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최근까지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등 생태주의적 삶을 지향한다. 그래서 늘 생태주의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그 경계에 대한 생각이 많다.



어떤 계기로 산내에 살게 되셨나요.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네요. 가장 구체적인 이유는 음식물 쓰레기를 땅에 버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90년대 초중반에 쓰레기봉투가 처음 나왔거든요. 쓰레기를 돈 주고 버리는 시대가 온 거죠. 그게 되게 이상한 거예요. 눈에 쓰레기가 보이기 시작하니까 저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어요. 

또 하나는 도시의 속도가 저한테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집이 잠실이고 작업실이 홍대였는데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막 몰려와요. 그사이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지더라고요.

세 번째는 연극 작업을 계속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IMF가 끝나고 모두가 힘들 때였고, 같이 연극하던 선배들이 전부 빚더미에 올라앉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여러 이유가 겹쳤던 것 같아요.


젊은 시절 서울에서 연극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은 국문과를 나왔고 대학원에서 극작을 전공했어요. 극을 쓰려면 연극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연기와 연출도 했었죠. 사실 산내에서는 연극할 생각이 없었어요. 연극하는 지인들이 저한테 왜 도망가냐고 물어보기도 했죠. 그때는 도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도망 왔더라고요. 잘 왔죠.(웃음) 실상사 대안학교에서 연극 수업을 제안받으며 연극을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그 힘으로 계속 희곡을 보고 연극도 올리고 할 수 있었죠. 


지역에서 벌이는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낭만세상이라는 희곡 읽기 모임이 있었어요. 낭독으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함께 희곡을 읽다 보니 직접 연극을 올리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렇게 마을 극단 '떼아뜨르 마고'가 만들어졌어요. 올해 10주년 공연을 준비 중입니다. 





시골에서 연극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텐데요. 주민들도 적겠고요. 

중요한 질문인데요. 저는 연극을 굉장히 완고하게 배워서, 연극은 '예술'이고 전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픈 흑역사지만 예술지상주의가 있었습니다. 준비가 안 된 사람들과 연극을 하려니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연습 시간에 늦는 것부터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실제로 극단 친구들에게 뭐라고 많이 했었죠. 


나중에 깨닫게 된 건데, 직장에 다니면서 연극하시는 분들이 제일 열심히 하세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오는 사람들이에요. 이분들만큼 절실한 사람이 없어요. 귀한 사람들과 작업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어요. 연극에 대한 생각 자체가 많이 바뀌었죠. 연극은 말하고 싶은 사람과 그걸 들어주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걸요. 저희 마을은 그게 항상 준비되어 있거든요.


월간 정상순이라는 공연 플랫폼을 들어가보니 공연 활동이 활발하더군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우리 사회에 공통적인 감각이 생겼잖아요. 너무 많은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그 이후에도 혐오의 문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이 많았어요. 뒤통수 맞는 느낌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아서 월간 정상순을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하지 말고, 항상 이야기할 준비를 하고 있자고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공연을 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게 된 거죠.


공연이 보통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공연 내용이 정해지면 먼저 산내 커뮤니티에 알리고, 관객을 모집해요. 구독료라는 이름으로 만원 정도를 티켓값으로 받습니다. 수익금은 함께 만든 배우들과 n분의 1로 나누고요. 요즘은 돈을 받는 게 재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해서 관객들 자율에 맡기고 있어요. 먹거리를 주는 분들도 계시고요. 재밌는 게 이번 달은 못 한다고 이야기해도 후원금을 계속 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장소는 학교 강당이나 마을 회관에서 주로 합니다. 


여성, 비건, 장애인과 같은 소수자를 주로 다루시잖아요. 공연에 그들이 주체로 참여하기도 하나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저는 비건이고, 떼아뜨르 마고 친구들은 비건이 아니에요. 혼자 비건을 주제로 일인극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몇 명이 본인들도 한 달 정도 육식을 하지 않으면서 같이 해보겠다는 제안을 해준 적이 있어요.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도 이런 공연을 봤으니 한 달 정도는 비건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다고 해요.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함께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죠. 비건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페미니스트지만 떼아뜨르 마고 친구들 전부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에요. 그냥 교집합이 있고, 스며들듯 연극을 하는 거죠. 서로가 말하는 걸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선생님께 연극은 언어 자체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거죠. 학교 다닐 때는 뭘 쓰고 싶은지 몰랐는데 산내에 있으면서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40대 중반에, 이럴 수가! 이후로는 그런 얘기를 많이 썼어요. 여성에 대해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약자와 소수자들에도 관심이 생기게 됐고요.

제 연극은 마중물일 뿐이고, 이 마중물을 통해서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만 메시지를 주는 게 제1의 목표여서는 안 되죠. 저 스스로 재미있고 싶어요. 정색하고 메시지를 주려고 하면 작품이 이상해져요. 재미있게 다루기 힘든 주제들이지만, 그럼에도 재미있게 전하고 싶어요. 


페미니즘 활동도 활발하시던데요.

'문화기획달'이라는 남원여성단체에서 산내 여성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산내에 살면서 겪었던 성희롱, 성추행 경험이 쏟아졌어요. 봇물이 터진 거죠. 그 이후에 '농촌 성문화 돌아보기' 등 여러 프로젝트를 문화기획달과 함께 하면서 욕도 엄청나게 먹었어요. 저희가 마을에서 소위 'X년'이 된 거죠. 저희끼리 'X년파티'도 하고 그랬어요.(웃음)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치고 나가떨어지기 좋은 상황이잖아요. 


처음보다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십니까.

2018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에서 피해 경험 말하기대회를 했었어요. 도시에서 하는 거랑 다르게 가해자들이 다 듣고 있는 상황이에요. 마을 사람들이니까요. 그 이후에 어떤 분이 정말 몰랐다면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전해왔어요. 되게 고마웠고, 조금씩 바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제가 남편과 딸이 있는, 소위 정상가족의 사람이라 가능했다는 씁쓸한 생각도 해요. 남편이 마을 사람들과 유대가 있었어서 다른 여성들에 비해 공격을 덜 받았거든요. 


산내에서의 삶이 선생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20년을 살았지만 '내가 정말 여기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늘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을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원래는 마을에 문제가 있어도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갔는데, 살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부터는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됐죠. 페미니즘 이슈들을 얘기하면서부터 도망가지 않고 여기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최승자 시인의 <내 청춘의 영원한>이란 시를 좋아하는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그런데 어느새 20년을 넘게 여기서 산 거예요. 매번 다른 곳을 꿈꾸면서요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