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25.9월호

내 안의 이야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극작가 최정




팍팍한 민초들의 삶을 위로하는 조선시대 주인공부터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속 잊힌 사람들의 이야기, 군산 성매매 집결지 화재사건을 다룬 이야기까지. 극작가 최정이 써온 작품들을 나열하면 마음 한편이 묵직해진다. 작가는 주로 역사의 소외된 인물, 특히 여성의 삶이나 우리의 전통, 설화 등 가볍지만은 않은 주제들을 다루어왔다. 나고 자란 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연극의 폭을 넓혀온 시간도 어느덧 20여 년. 작가의 세계에도 작은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이제 거대한 역사보다는 작은 존재들이 살아온 역사, 멀리 있는 것보다는 일상 가까이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지금, 작가 최정이 우리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작은 일상에서 발견하는 이야기  

2002년 연극 〈숨길 수 없는 노래〉로 데뷔한 작가는 첫 작품으로 전북연극제 희곡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이후 〈부치지 못한 편지〉, 〈이화우 흩날릴 제〉, 〈여자, 마흔〉, 〈불꽃처럼 나비처럼〉 등 여러 작품을 쓰며 희곡작가로서 정체성을 다졌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피해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작품 〈부치지 못한 편지〉는 특히 마음이 가는 작품 중 하나다. 이 이야기를 쓰며 처음으로 희곡작가로서 계속 해나가고 싶다는 열망과 확신을 얻었다. 역사적 사건에 주목하며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해오던 그는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조금 다른 눈을 갖게 되었다. 아내이자 엄마인 ‘나’는 곧 작가인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제가 몰랐던 일상의 소중함이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일상의 것들은 우리가 가치 있게 바라보지 않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 것들을 그대로 담아내도 감동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작업을 한참 쉬다가 썼던 〈여자, 마흔〉이라는 작품이 경력 단절 여성의 이야기인데요. 저도 막 둘째를 키우던 시기여서 더 공감을 하며 썼고, 이때를 기점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결이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아요. 너무 거창한 이야기는 더 이상 제 마음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일상의 이야기들을 더 잘 담아내고 싶어요.




<엄마의 카세트 테이프> 공연 모습



작품의 소재를 찾기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대신 늘 귀를 열어두는 게 중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듣고, 작은 목소리도 다시 듣고, 아주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늘 있었지만 잘 보지 못한 것을 유심히 보고 들으려 노력한다. 가까운 10월, 작가는 예술인 협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군산 임대아파트 거주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준비하고 있다. 정해진 공연장이 아닌, 실제 아파트 안에 있는 작은 야외무대와 놀이터를 공연장 삼아 주민들과 함께 무대를 꾸밀 계획이다. 

 

그는 늘 새로운 방식의 연극을 고민해왔다. 일상의 공간에서 공연을 펼치고, 배우가 아닌 누구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연극을 향한다. 지난해 선보인 〈엄마의 카세트 테이프〉 역시 이러한 시도 중 하나였다. 과거 카세트 테이프 공장이었던 팔복예술공장에서 그 시절 여성 근로자들의 삶을 이야기한 이 작품은 공간 전체를 무대로 활용했다. 관객들에게 이름을 부여해 참여를 유도하고 함께 건물 이곳저곳을 이동하며 연극을 완성했다. 그의 희곡은 무대화되기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공간,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이기도 하다. 

 

문학인이자 연극인, 활동가의 삶 

작가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펼친 윤동주 시인의 시집을 읽고 작가의 꿈을 키웠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연극반 오디션에 같이 가달라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3년 내내 연극반 생활을 했다. 그의 안에서는 자연스레 문학과 연극이 하나의 세계가 되어갔다. 전북대 국문과에 들어간 그는 당시 사라져가던 연극동아리를 다시 세우고 친구들을 모았다. 본격적으로 희곡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부푼 건 곽병창 교수의 희곡 창작 수업을 들으면서다. 그때 처음 습작을 해보며 희곡의 매력에 빠졌다. 이후 전주시립극단과 극단 명태 등에서 활동하며 지역 연극에 발을 들였다. 


극작가는 혼자가 아닌 협업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작가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기에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연극판에 있으며 위계적이고 부당한 모습들을 목격하는 일도 많았다. 2009년, 그는 창작자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만나고 협업할 수 있도록 직접 지역의 젊은 연극인들과 극단 ‘T.O.D랑’을 만들었다. 낭독극이 생소하던 시절, 카페 등 일상의 공간에서 소리연극을 시도하며 관객과 소통하는 연극의 길을 열기도 했다.


희곡은 연극의 한 부분이라고 걸 잘 이해하고 있어야 창작의 과정도 즐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영화나 다른 장르도 비슷한 면이 있겠지만, 그런 협업의 과정을 본인 스스로 즐겨야 그 안에서 또 배우는 것들이 생기거든요. 어렵긴 해도 저는 사람들과 같이 뭔가 바꿔나가고 발견하는 과정이 즐거워요.




여성 연구자들과 모여 결성한 지식공동체 지지배배를 통해서도 그는 의미 있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2018년부터 희곡을 비롯한 시, 소설, 만화, 영화 등 각자 다른 분야 연구자 5명이 모여 사회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목소리를 내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주로 주목하는 화두는 여성, 지역, 기후위기 등이다. 최근에는 돌봄에 주목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서로 쓴 글을 모아 책으로 발간하기도 하고, 대중강연을 기획해 여는 등 나름의 성과들을 쌓아가고 있다. 여전히 이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느낀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지만 작가는 개인 작업만큼 지지배배에 참여하는 일도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 여긴다. 


저희는 이게 나름의 분투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활동이 아니면 비정규직 연구자, 혹은 강사로 불리는 저희는 뿔뿔이 다 흩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떤 연대가 없거든요. 서로가 가진 힘을 모으고 나누는 이런 활동이 문화예술계의 생태계를 평평하게 만드는데 그래도 작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봐요.


희곡은 계속해서 밖을 향하는 작업

바쁘게 활동하고 있지만 작가는 정작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는 데 아쉬움을 느낀다. 스스로가 느린 호흡을 가진 사람임을 알기에 여러 작업을 병행하며 작품을 쓰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조금 느리더라도, 틈틈이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쌓아가고 있다. 언젠가는 새만금 갯벌 이야기에 대해 쓰고 싶은 꿈도 갖고 있다. 아직은 자신의 안에서 이야기가 좀 더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는 희곡이라는 장르에 완성이란 없다고 말한다. 텍스트로 존재하던 지문과 대사는 무대에 설 때마다 매번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희곡의 힘이자 매력이다. 


연극은 무대에 올라가서도 사실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관객들을 만나고 나면 또 다르게 바뀔 수 있죠. 그래서 희곡은 완성이 없는 것 같아요. 내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연출과 배우, 또 다른 누군가가 채워주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죠.


희곡은 안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아닌 계속해서 밖으로 나아가는 작업이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자 바깥에 있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환경을 만나며 이야기는 계속 단단해진다. 어쩌면 희곡은 완성이 없는 문학이 아닌 매번 새롭게 완성되는 문학이 아닐까. 




글·사진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