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25.10월호

지역에서 문제아로 살아남는 법

디자인에보 김현정·박세진 대표




스스로를 별종, 외계인이라 부르는 두 사람이 있다. 어떤 행성이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외계인이 되고 싶은 이들. 디자인에보의 대표 김현정, 박세진 부부의 이야기다. 2010년 전주의 작은 사무실로 처음 문을 연 디자인에보는 이름처럼 디자인 회사로 출발했다. 그러나 10여년이 흐른 지금, 디자인에보는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별종’의 행보를 걷고 있다. 아티스트 레지던시 운영부터 작가 미술장터 기획까지. 지역과 문화, 예술, 공간, 사람을 잇는 실험을 계속하며 새로운 문화예술의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평범한 디자인 회사는 어떻게 이만큼 품을 넓힐 수 있었을까? 외계인이라기에는 너무나 해맑고 다정한 미소를 지닌 김현정, 박세진 대표를 만났다.


고택과 아트페어, 새로운 시도   

요즘 두 대표는 ‘고택 아트 페스타(GAF)’의 막바지 준비로 바쁘다. 최근 디자인에보의 이름을 알린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인 고택 아트 페스타는 2022년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작가 미술장터 개설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일종의 아트페어 축제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매개로 현시대의 예술을 담아내고자 완주 소양고택, 무주 향교 등 지역의 고택을 무대로 한 독특한 테마의 아트페어를 만들었다. 올 9월에도 어느덧 다섯 번째 행사를 열었다. 올해는 전북을 벗어나 안동 임청각을 무대로 삼았다. 


고택이라는 장소성이 중요한 탓에 매회 공간을 정하는 일은 가장 큰 숙제다. 올해는 전주 안에서 가능한 공간을 찾았지만 결과적으로 어려움이 따랐다. 주변에 수소문을 하던 중 지역의 한 관계자가 전주와 자매결연 도시인 안동으로 가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지역을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가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임청각을 향하게 됐다.


2023 고택아트페스타




박세진ㅣ 민간 소유의 고택은 비교적 협조가 쉽지만, 저희가 전하고 싶은 고택의 느낌을 온전히 담기에는 너무 세련된 공간이기도 하고 한계가 있어요. 그런데 국가유산은 상업 전시를 하기에 제한이 많기 때문에 인허가 절차도 복잡하고 도문화유산위원회의 승인도 받아야 하죠. 작년에 무주 향교에서 행사를 열면서 고생도 정말 많이 하고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김현정ㅣ 이제 5회 차를 거듭하며 여러 가지 실상을 겪다 보니까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에서 무언가 시도하는 건 녹록지 않다는 걸 느껴요. 하지만 결론은 해볼 만하다는 거예요. 힘들고 스트레스 받더라도 어쨌든 새로운 결과를 남기고 다니니까 점점 스토리가 생겨나요.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해나가는 이런 시도들이 지역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올해 고택 아트 페스타에는 69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45명의 작가와 함께했던 작년보다도 커진 규모다. 아트페어라면 흔히 작품의 판매량에 따라 성공 여부가 평가된다. 하지만 이들은 작품을 많이 파는 것보다 참여 작가들을 알리고 연결하는 일에 주목한다. 김 대표는 냉정하게 지역에서 ‘팔리는’ 아트페어는 흔치 않다고 말한다. 아트페어가 지역에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작품 판매 외에 작가들에게 새로운 네트워킹 통로를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생각이다.







민간 레지던시의 길을 열다

이들의 눈이 작품보다 작가를 향한 이유는 디자인에보가 걸어온 길을 들여다보면 찾을 수 있다. 디자인에보는 2018년부터 ‘에보 미디어 레지던시’를 운영해왔다. 전북특별자치도문화관광재단의 창작공간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시작한 레지던시는 작년까지 7년차를 지나며 입주 작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고택 아트 페스타 역시 레지던시 작가들의 다음 발판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에보 미디어 레지던시는 작가 공모를 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두 사람은 가깝거나 먼 거리에서 많은 작가들의 활동을 오랜 시간 지켜본다. 전시 소식이 들리면 직접 가보고 작업실에도 찾아가며 2~3년 동안 작가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여러 세대가 어울릴 수 있도록 최대한 다양한 연령대로 작가를 구성해 매년 하나의 팀을 꾸리듯 입주 작가를 선정한다. 훌륭한 작품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꾸준히 작업에 임하는 성실함과 성장 동력을 갖춘 ‘사람’을 면밀하게 보려한다.  


김현정ㅣ 레지던시는 어떤 태도로 접근하느냐가 중요한 사업 중 하나예요. 저희는 작가를 선정하고 나면 1년 간 그 사람의 매니저가 된다는 기분으로 해왔거든요. 전시를 어디서 누구랑 하는지, 하다못해 밥은 제때 먹었는지 반찬은 뭐였는지,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챙겨요. 그 정도의 정성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으면 레지던시는 운영할 수 없어요.


박세진ㅣ 레지던시 사업은 누군가의 삶을 바꿔버릴 수도 있어요. 한 작가의 삶에서는 그만큼 진중한 사업인 거예요. 이곳에 와서 온전히 작업에 몰두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에보 레지던시 출신의 작가들이 나중에 잘 나가는 작가님이 되었을 때 거기에서 오는 뿌듯함이 있죠. 하지만 그만큼 결과를 얻기까지 긴 숨이 필요한 분야인 것 같아요.


부부는 우스갯소리로 이곳이 레지던시를 빙자한 하숙집이라고도 한다. 언제든 찾아오기만 하면 따뜻한 밥 한 끼와 술 한 잔, 잠자리도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다. 이곳을 거쳐 간 작가들에게는 이만큼 든든한 집이 또 없다. 입주 작가로 인연을 맺어 이제는 한 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도 있다. 2024년 레지던시 출신의 김동희 작가는 디자인에보의 정식 팀원으로 합류해 아트페어의 기획 등을 함께하며 서로가 서로의 지원군이 되고 있다.




2023 제주곶자왈 대지미술전시, 입주작가들과 단체사진



고난과 우여곡절은 우리의 힘 

초창기 디자인에보의 사무실은 친구가 운영하던 학원 건물에 남은 5평짜리 쪽방이었다. 컴퓨터 앞에서 아이 젖병을 물려가며 일을 하고, 매일 밤을 새워 돈 버는 목표에만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디자인회사로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는 팔복동으로 자리를 옮겨 공유 공간을 운영하기도 했다. 좁은 사무실에서 고생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작업 공간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창작자들에게 공간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오지랖(?) 끝에 돌아온 건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남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충격과 동시에 자극제가 되었다. 이젠 진짜 우리 것을 제대로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에 지금의 서신동 자리에 건물을 얻고 하나하나 고치고 채워나갔다. 그러나 포부와는 다르게 그들은 레지던시에 관심을 갖게 되며 또 다시 ‘우리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 디자인 회사가 예술가 레지던시에 뛰어드니, 디자인 분야와 문화예술 쪽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세진ㅣ 저희는 영상이랑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미술 전공자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디자인 회사가 문화예술 판에 뜬금없이 들어와서 작가들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꼴이 된 거죠. 근데 5년, 6년 시간이 지나니까 문화예술 쪽에서도 이제는 저희를 좋은 사례로 이야기해주세요. ‘너네가 옳았던 것 같다’ 칭찬을 해주시기도 하죠. 거기까지 가는데 7년이 걸렸어요.


박 대표는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본격적인 팝아트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도 했다. 2018년 무렵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하며 ‘박스피넛’이라는 이름으로 미술 시장에서 활약 중이다. 우리가 아닌 남을 위해 해왔던 일이 결국은 어떤 형태로든 두 사람에게 돌아오고 있다. 


김현정ㅣ 작가는 절대 혼자 클 수 없어요. 같이 어울리고 관계를 맺으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기도 하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돌아보면, 저희도 무작정 모르고 레지던시를 시작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괜찮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느껴요. 자기 위안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희 옆에 사람이 남았잖아요. 앞만 보고 디자인 사업만 했다면 몰랐을 소중한 것들을 많이 얻었죠.


앞으로의 최대 미션은 보조금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속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는 일이다.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 어떤 우여곡절도 꾸준함으로 돌파해 버리는 이들의 에너지라면 무슨 답이든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사진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