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웅 작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유명한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작가의 작품에는 직접, 자세히, 오래 들여다봐야만 보이는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물감 대신 책을 재료로 그린다. 빽빽한 도시의 빌딩숲, 고즈넉한 한옥 지붕, 곧은 나무까지. 재료의 정체를 알고 나면 그림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책이 캔버스 위에서 이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니. 새삼 놀랍다. 화가 이정웅과 책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책을 통해 그리는 그의 세계를 만났다.
이야기 조각이 모여 그림이 된다
그의 작업은 책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된다. 빛바랜 고서부터 소설, 시집, 교과서, 잡지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공통점은 더 이상 읽히지 않는 헌책들이라는 점이다. 재료가 될 책은 다시 펼칠 수 없도록 접착제를 발라 고정한다. 작두와 칼로 책의 단면을 잘라 크고 작은 조각을 만든다. 재질과 색깔, 내용도 모두 다른 책의 단면들은 밑그림 위로 조화롭게 섞이며 하나의 그림이 된다. 오래된 책과 요즘 책,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책들이 한 화면에 공존하며 여러 이야기가 이어져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저한테는 책이 물감이에요. 한 권의 이야기가 있으면, 그 이야기의 중간중간을 잘라서 작품을 만들잖아요. 끊어진 이야기들이 그림 안에서 새롭게 연결되며 또 하나의 책을 만든다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려요. 여러 이야기의 단면을 연결해서 저만의 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이건 그림이기도 하지만 한 권의 책이기도 해요.
초기에는 주로 책과 물감을 함께 활용한 추상화를 그렸다. 이후 책의 이미지를 더욱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변화하며 실제 형상을 담아내는 지금의 방식까지 발전해왔다.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 풍경에 주목한다. <City story> 연작을 통해 서울, 전주 등 다양한 도시의 장면을 담고 있다. 회색 건물 사이로 사람들이 뛰놀고 초록의 나무가 빈틈을 채운다. 작가는 책 속의 여러 이야기가 섞이고 모이는 과정이 한 가족의 이야기가 모여 마을을 이루고, 큰 도시를 이루는 것과 닮아있다고 보았다. 그렇게 ‘도시’라는 소재에 매력을 느끼며 책으로 도시를 짓게 됐다.

City Story-05, 2024
나만의 재료를 찾는 일에 대해
작가는 책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예술가로서 새로운 무언가를 고민하던 시기, 우연히 화실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책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한 권 한 권의 다른 이야기, 그 속의 크고 작은 활자와 이미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책의 단면이 만들어내는 직선의 선에서 짜릿한 속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책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책은 여전히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는 최고의 재료이다.
저는 대학 때부터 물성이 있는 재료를 좋아했어요. 물감은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굉장히 넓어요. 근데 책은 정교한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붓으로는 점 하나도 쉽게 찍을 수 있지만 책으로는 그게 안돼요. 작업도 오래 걸리고 힘겹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나만의 방식이 있다는 게 너무 재밌어요. 책의 단면은 색이 다 다르고, 하나의 책도 페이지마다 활자가 다르니 자를수록 색이 계속 변하죠. 그 과정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색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실제 독서를 즐기고 좋아하던 작가는 주로 소장한 책이나 헌책방에서 구한 것들을 재료로 사용했다. 언젠가는 집에 있는 책을 잘랐다가 아버지에게 된통 혼난 기억도 있다. 그의 작업이 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여기저기 책 선물이 끊이지 않는다. 수많은 책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이 보내준 것들이다. 속사정을 모르는 누군가는 귀한 책을 어떻게 난도질할 수 있냐고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버려질 책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 과정이 가치 있다고 전한다. 대답을 듣고 나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한다.
우리 주변에는 표현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요. 내 주변의 아주 사소한 것들을 들여다보세요. 자세히 보면 표현할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게 많은데 우리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에요. 자기만의 재료를 찾고, 근성과 지구력으로 꾸준히 해나간다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봐요. 제 위의 선생님들은 힘들 때일수록 더 터뜨려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그 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지우다
누구는 그의 작품을 조각이라 하고 누구는 회화라고 한다. 두 영역 사이에서 답을 찾아가며 오히려 그 경계는 지워지고 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붓 대신 칼을 잡고 살아온 운명처럼, 앞으로 그는 회화와 조각을 아우르는 시도를 꿈꾼다. 캔버스를 벗어나 온전한 입체 작품을 만들고 싶은 바람도 있다. 작품의 형태는 조금씩 변화해가겠지만 그 재료는 앞으로도 ‘책’일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책으로 끝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20년 넘게 이 작업을 해오다보니 잘 팔리는 작품이 있으면 저도 모르게 제가 그 작품을 복제하고 있더라고요. ‘새롭다’고 말은 하는데 갈수록 새롭지가 않아요. 우리나라 문화가 위상이 높아졌잖아요. 문학이나 음악, 영화처럼 미술에서도 좀 새로운 열풍이 불어야 해요.
이정웅 작가는 여느 직장인처럼 매일 아침 10시면 작업실에 출근한다. 그림만큼 애정 하는 고소한 커피 한잔을 내려 마시고, 밤 10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는 책의 한 귀퉁이를 반듯이 자르고 다듬는 것처럼 작가로서 자신의 삶도 부지런히 다듬고 있다. 어느덧 중견작가가 되었지만 꾸준히, 새로운 길을 그리는 그의 열정이 빛난다.
사람들이 책을 읽을 때 받는 감동이나 여러 느낌이 있잖아요. 그게 제 그림 안에서도 똑같이 살아있다면 좋겠어요. 물른 그림을 통해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작품을 통해 책 한 권만큼의 감동과 위안을 받길 바랍니다.
국내외를 무대로 활동 중인 그는 오랜만에 지역에서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내년 4월 전주에서 한옥을 중심으로 작업한 작품들을 모아 선보일 계획이다. 책으로 그린 그림은 직접 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 다가오는 봄, 그가 그린 특별한 책들을 직접 펼쳐보길 권한다.
글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