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예술 분야의 역사를 읽어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각 시대를 살아낸 인물을 따라가는 일이다. 한국 미술사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세계가 쌓여 만들어진 서사는 우리 미술사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전북도립미술관은 지난 2021년 ‘사람’을 통해 지역 미술사를 정리하는 의미 있는 시도를 했다.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를 통해서다. 전북 미술의 기반을 다진 작가들을 한 명씩 호명하고, 충분히 조명되지 않았던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작업이다. 올해까지 벌써 다섯 명의 작가와 만났다. 이 과정에는 오랜 시간 미술사를 공부해온 이애선 전북도립미술관장을 중심으로 여러 학예사의 치열한 고민과 열의가 있었다. 3월,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의 여섯 번째 전시를 앞두고 이애선 관장을 만났다.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 박민평
인물을 통해 지역 미술사를 보다
‘지역 미술사’는 최근 공립미술관들이 주목하는 공통의 관심사 중 하나다. 도립미술관의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가 더욱 주목되는 이유다. 전북도립미술관이 세워졌던 2004년 당시에도 개관전 〈전북미술의 맥〉을 개최하는 등 지역 미술사 연구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며 도립미술관의 기능은 연구보다 소장품 수집과 전시에 머물렀다. 도립미술관은 전북 미술계의 오랜 요구에 부응해 2020년부터 본격적인 지역 미술사 연구에 나섰다. 도내 미술인들을 만나 기초 조사를 진행하고 장르별 작가 목록을 작성했다. 2021년, 첫 번째 연구 작가인 천칠봉의 전시가 열렸다. 다음 해 신임 관장으로 부임한 이애선 씨는 “왜 천칠봉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출발했다. 두 번째로 이의주 연구전을 이어가며 ‘누구’를 조명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다시 세워나갔다.
두 번의 전시를 지나고나니 연구시리즈의 방향을 다시 고민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어요. 내부적으로도 미술사적 안목을 갖추는 시간이 필요했죠. 작가 선정 기준에 있어서는 ‘지역성’을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지역 안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 작가여야 한다는 것과 미술사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뚫고 새로운 이야기를 제시한 인물인지, 미술 전체에 새로운 흐름을 만든 인물인가에 관점을 두고 있어요.
이후 문복철, 박민평, 허산옥 등 전북 미술의 지평을 넓혔던 인물들이 차례로 조명되었다. 한 작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가 열리기까지는 최소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 수많은 작품과 자료 더미 앞에 앉아 개인의 삶을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레 그 옆의 다른 인물들이 보이고, 새로운 연결고리가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박민평의 연구전은 이전에 문복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문복철에 대한 자료를 모으다보니 뜻밖에도 박민평 선생의 자료가 계속해서 나왔다. 두 작가의 작품세계를 비교하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도 됐다. 박민평 연구전은 이 관장에게도 특히 기억에 남는 전시다. 당시 유족이 40여 점의 작품을 기증해 전시를 풍성하게 구성할 수 있었다. 이만큼 많은 수의 작품 기증은 흔치 않은 일이다. 덕분에 중요 시기의 작품을 모두 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다. 연구를 이어가는데 큰 동력이 되었던 순간이다.
3월에는 여섯 번째 연구시리즈로 〈전수천: 언젠가 거인은 온다〉가 개막한다. 그동안의 작가 중 가장 최근 세대로 설치작가로도 처음이다. 전북 미술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공부가 필요하지만 여섯 작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는 전북 미술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특징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시리즈만으로 전북 미술을 규정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다만 그동안의 전시를 보며 느낀 건, 대단히 진정성 있고 실험적인 움직임이 전북에서 일어났다는 거예요.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실험을 하고 묵묵히 그리고 있었구나, 이 점이 저한테는 굉장히 감동이었어요. 어떤 환경에서도 절대 그치지 않는 마음. 이것이 지금 전북 미술사가 주목하고 있는 작가들의 큰 특징인 것 같아요.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 문복철
또 다른 축, 청년작가와 교육
지나온 역사를 정리하는 일만큼 오늘날의 지역 미술계를 살피는 일 역시 도립미술관의 중요한 역할이다. 그는 청년작가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미술관’으로서 함께할 수 있는 길에 집중해야한다는 생각이다. 큰 규모의 전시를 진행할 경우 최소 20% 이상은 지역 작가의 참여를 기준으로 삼고, 매년 3명 내외의 청년작가를 선정해 작품 제작비를 지원하고 기획전을 열고 있다. 특히 집중하는 것은 영향력이 큰 비평가와 작가들의 연결이다. 지역은 전문 비평 인력이 부족하다보니 작품 활동에 따른 비평이 활발히 이루어지기 어렵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울분관에서 전시를 진행해 지역 작가들을 외부에 알리고 비평가와 연결되는 통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열어가고 있다.
주목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교육이다. 도립미술관은 올해로 4년째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형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교육문화팀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개발해 미술관의 정서를 명확히 담아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작년에 진행한 교육 전시 〈아이스크림 똥〉이 대표적이다. 전시에서는 아이들이 모여 똥 모양의 비누를 만들고 그 비누를 미술관 화장실에 비치해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비슷한 모양을 한 아이스크림과 똥, 두 대상을 통해 혐오와 추앙, 좋고 나쁨, 깨끗함과 더러움 같은 감정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교육 전시는 몇 가지 원칙을 두고 있어요. 낯선 사람과 반드시 공동작업을 할 것, 결과물은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고 미술관에 남겨져 여러 사람이 동시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대신 누가 만들었다는 기록을 남겨 쓰는 사람이 알 수 있게 하고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 체계를 전면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가능한건 학예사들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연구자로서 이름난 작가들의 삶을 되짚어 갈 때도 흥분되지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좋은 기획을 발전시켜 가는 과정을 볼 때 관장으로서는 보람이 정말 큽니다.

미술관은 여전히 힘이 있다
관장직을 떼면 그는 순수한 미술 덕후(?)이다. 고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어릴 때만해도 미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림과 처음 만난 건 서울로 이사를 간 후, 중학교 1학년 무렵이다. 미술 선생님이 주신 피카소 전시 티켓을 들고 혼자 미술관에 갔다.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처음 느낌 감정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전시장을 나와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어쩐지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 순간이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림을 통해 공감하고 감정을 풀어내는 경험을 하며 그는 자연스레 미술에 빠져들었다. 매일 미술책을 오리고 붙이며 엽서를 만들어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한 학년이 끝나면 미술책을 오려서 그림을 쭉 나열하고 그걸 그냥 보는 것만으로 좋았어요. 그렇게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미술관과 인연을 맺은 건 2000년대 초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도슨트 양성교육을 통해서였어요. 이후 아르코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했어요. 이게 첫 시작이었죠.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교육강사로 활동하는 등 그는 늘 미술관이라는 공간 안에 있었다. 그러나 비전공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자문이 들었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늦은 나이 대학원에 가 미술사학을 파고들었다. 온전히 미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미술 가까이 머물다보니 전북도립미술관과의 인연도 이어질 수 있었다. 흔히 미술은 어렵다고들 한다. 그는 어릴 적 미술관을 통해 느낀 해방감이 자신을 이만큼 이끌고 왔듯, 여전히 미술이 지닌 힘을 믿고 있다.
우리가 문학을 읽을 때 작가의 문체나 표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사람이 하고 싶은 이야기에 주목하잖아요. 미술도 똑같아요. 지금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보는 거죠. 그림의 독특한 색깔이나 형식보다는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느끼는 게 중요한 시대예요. 동시대 작가들은 생각보다 큰 문제들을 계속 던지고 있거든요. 그 문제에 대해 속으로 반론도 해보고 논쟁도 벌이고, 작품이 좀 어렵다면 불평이라도 한마디 해보는 거예요. 그 과정을 통해 내가 후련해졌다면 그것까지도 감상의 한 영역이 될 수 있죠.
미술을 잘 몰라도 미술관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술관에 가면 언제든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진다. 그 귀한 순간을 선물하기 위해, 그는 앞으로도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전북도립미술관을 찾는 많은 이들이 그가 말한 ‘미술이 지닌 힘’을 실감하고 돌아가길 바란다.
글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