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섭 점장
3월은 1년 중 서점이 가장 바쁜 달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서점이 그렇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길문고의 풍경은 그렇다. 대형서점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하는 이 책방에는 학습서부터 국내외 소설, 에세이, 만화책까지 없는 게 없다. 3월의 이른 아침, 사거리 낡은 상가의 2층 ‘한길문고’로 향했다. 새로 들어온 참고서들을 정리하느라 서점의 직원들이 분주하다. 그 분주함 뒤로, 책을 고르는 손님들의 고요한 풍경이 함께한다. 놀이방처럼 꾸며진 한쪽 공간에서는 어린 아이가 뛰어논다. 구석구석 책과 사람이 섞여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 자체로 따뜻했다. 특별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이다. 서점을 넘어, 시민들의 일상적 공간이 되기까지. 한길문고는 어떤 시간을 지나왔을까. 40년 가까이 책방을 지켜온 문지영 대표와 지금의 한길문고를 함께 이끌고 있는 김우섭 점장에게 그 시간을 들었다.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서점
한길문고는 대표인 문지영 씨를 포함한 다섯 명의 직원이 한 식구처럼 복작복작 서점을 꾸려가고 있다. 대부분이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이들이다. 문 대표와 김우섭 점장이 함께한 세월도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12년 전, 김우섭 씨가 한길문고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문 대표의 제안으로 정직원이 되며 서로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다. 한길문고의 직원들은 매달 주기적으로 모여 이들만의 독서모임을 갖는다. 수만 권의 책을 다 읽을 수 없기에,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많은 독자들이 한길문고를 통해 느끼는 따스한 에너지는 이러한 내부적인 결속에서부터 비롯된다.
문지영ㅣ 변명이긴 하지만, 하루 종일 서점 일을 하다보면 정작 책 볼 시간이 없어요. 저희 딸한테도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게 참 쉽지 않더라고요. 그럼에도 ‘읽기 위해서’ 직원들끼리 독서모임을 생각하게 됐죠. 이번 달에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책을 읽었어요. 의도적으로라도 책 읽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늘 고민하고 있죠.
요즘의 서점은 책만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다. 책을 매개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이 커졌다. 한길문고는 이러한 역할을 앞장서 실천해온 곳 중 하나다. 달마다 문화행사가 열리고 유명한 작가들이 찾아오며 이곳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2월에는 군산을 무대로 특별한 북마켓을 열었다. 올해의 첫 북페어 행사로 주목을 받은 ‘북씬(Book Scene)’이다. 이름처럼 ‘책으로 이어지는 작은 장면들’을 향한 이 행사는 한길문고로부터 시작됐다. 늘 즐거운 일을 열망하던 문 대표의 꿈이 실현된 자리였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선도서점 육성사업에 선정되며, 당시 주어진 예산은 200만원이었다. 행사를 치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비용이었지만 군산의 서점들이 흔쾌히 나서서 힘을 보태주었다. 전국에서 38개 참가사가 모이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이벤트와 체험을 열었다.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 있는 작가와의 만남도 준비했다. 첫 행사라는 우려와는 달리 하루 동안 500여 명의 방문객이 다녀갔다. 작은 열망으로 시작한 자리였지만 여러 마음이 모여 큰 의미를 남겼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한길문고의 다양한 활동이 기반이 된다. 한길문고는 2018년부터 상주작가 지원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작가에게는 일정 급여를 통해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상주작가는 책방을 통해 지역 주민들에게 다양한 문학 프로그램을 선보이게 된다. 서점의 단골손님으로 만나 상주작가로 오랜 시간 함께한 배지영 작가는 이제 서점에 없어서는 안 되는 지원군이 되었다. 글쓰기 수업부터 강연 진행, 새로운 독서 프로그램 기획까지 도맡는다.

故 이민우 대표는 녹두서점에 이어 한길문고를 운영하며 지역의 독서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며 민주화운동에 참여, 이후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등 가치 있는 일에 앞장선 인물이다. 지난 2024년에는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났음에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제38회 책의 날' 기념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상주작가 프로그램에서 뻗어간 두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도 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군산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과 시민 작가들이 쓴 작품을 모은 책들이다. 문 대표는 “모든 시민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 중고책 기부자들의 후원으로 지역의 작가를 키우는 ‘3,000자 소설 수필 공모전’도 열었다.
문지영ㅣ 서점에 기부 된 중고책의 수익금은 그동안 소외계층을 돕는데 사용해 왔어요. 그런데 작년부터는 책을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죠. 시민 공모전을 열고 10명의 수상자에게 각 10만원씩의 상금을 드렸어요. 그 작품들이 모여 책이 된 과정도 뿌듯했죠. 생각보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분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우리가 그냥 책만 파는 게 아니라 문화적으로 한 축을 지켜야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재밌는 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김우섭ㅣ 지난 북마켓도 그렇고, 서점 내부적인 활동이 아니더라도 모든 경험은 결국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생각해요. ‘문화가 있는 날’에는 심야책방을 운영하기도 하면서 여러 시도를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지역 분들에게 문화적인 혜택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죠.
작은 기적이 모여 지켜온 시간
한길문고는 1987년 ‘녹두서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문 대표의 남편인 故 이민우 씨가 대표로 있으며 문을 열었다. 당시 시민운동에 앞장섰던 이민우 대표는 서점을 통해 가치 있는 일들을 해나갔다. 지금의 서점이 향하는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1998년 무렵, 서점은 ‘한길문고’로 이름을 바꾸고 군산을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2012년 여름, 예상치 못한 고비가 찾아왔다. 기록적인 폭우로 지하에 있던 서점이 물에 잠기며 10만 권의 책을 잃었다. ‘2012년 8월 13일’. 문 대표는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날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막막한 현실 앞에 주저앉아 있을 때, 서점은 시민들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며 젖은 책들을 옮기고 가지고 있던 책을 모아 기증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작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문지영ㅣ 관공서부터 대학 동아리, 개인적으로도 찾아오셔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셨어요. 어떤 분은 편지봉투를 두고 가셨는데 그 안에 돈이 들어있더라고요. 간식을 사다 주시는 분들도 있었죠. 시민들을 생각하면 저는 힘을 낼 수밖에 없어요. 가끔 지치더라도 우리가 나아갈 길은 시민에게 다가가는 길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해요.
이후 한길문고는 지금의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의 시민들이 힘을 모아준 덕에 불과 한두 달 만에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이듬해, 이민우 대표가 세상을 떠나며 또 한 번의 큰 아픔을 겪어야했다. 문 대표는 그의 뜻을 이어 시민에게 빚진 마음을 갚고, 받은 사랑을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서점을 운영해오고 있다. 입구 현수막에 적힌 ‘군산시민의 문화공간 한길문고’라는 문구가 어쩐지 마음 깊이 다가온다.

한길문고가 기획한 북마켓 '북씬(Book Scene)’
여전히 ‘꿈’ 많은 서점
한길문고 안에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공간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이 공간들은 누구에게나 무료로 대관하고 있다. 독서모임이나 연구 활동은 물론, 주말이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공부를 하고 가기도 한다. 앞으로도 이곳은 거창한 공간보다는 그저 시민들의 일상적 공간이 되길 꿈꾼다. 그 가운데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가기위한 노력도 놓지 않고 있다. 주로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은 서점의 폭을 넓히기 위해 최근에는 2~30대 젊은 독자를 대상으로 한 큐레이션에도 집중하고 있다.
김우섭ㅣ 요즘은 젊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서점을 좀 바꿔보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들이 좋아할만한 주제로 큐레이션을 하고, 작가를 섭외할 때도 젊은 층이 좋아하는 작가들을 찾는 식이죠. 또 SNS에 쇼츠 영상을 주기적으로 올리기 시작했어요. 제 나름대로 만들어보고 있는데 아직 배워야할 것도 많아서 열심히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한길문고의 달력은 매달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당장 4월에는 도종환 시인, 5월에는 김동식 작가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전시와 강연 등 재미난 일들이 연말까지 쭉 계획되어 있다. 그런데도 문 대표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언젠가는 서점이 자리한 나운동 일대의 상인들과 합심해 동네를 시끌벅적하게 채우는 ‘나운단길’ 축제를 열고 싶은 꿈이 있다. 은퇴를 할쯤에는, 아끼는 직원들이 모여 살 수 있는 주택을 짓는 일도 꿈꾸고 있다.
문지영ㅣ 주변에서 이제 ‘군산’하면 ‘한길문고’가 상징적인 존재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문을 닫는다는 게 이제는 내 개인적인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만큼 책임감을 갖고 이 서점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그가 꿈꾸는 일들을 이루는 과정에는 여전히 책과 사람이 함께할 것이다. 책,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그리울 땐 한길문고에 가아겠다.
글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