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반에 걸쳐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하루하루 이슈가 바뀌는 시대. 문화를 둘러싼 비평은 과연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문화저널이 마련한 ‘2024 비평의 숲’은 지역의 화두가 되는 문화이슈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모으는 공론의 장이다.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울창한 숲을 이루듯 건강한 비평과 다양한 목소리를 모아 지역문화의 숲을 키워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자리. 올해는 네 개의 주제를 이어간다.
첫 번째로 주목한 주제는 K-콘텐츠다. 넘쳐나는 유튜브 콘텐츠와 OTT 시리즈들, 요일별로 업로드 되는 수많은 웹툰과 갈수록 새로워지는 게임까지. 이제 콘텐츠 없는 일상을 하루도 상상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지역과 콘텐츠를 연결해 바라보면 현실은 어떨까.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K-콘텐츠의 이면, 지역의 콘텐츠 산업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분야별 창작자와 전문가들이 모여 의견을 나눴다.
주제 | K-콘텐츠, 지역에서 살아남기
일시 | 2024년 5월 22일(수) 오후 2시
장소 | 전주 한옥마을 공간 봄
발제
‘글로벌’ 뒤에 가려진 지역 이야기
국내 콘텐츠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지며 콘텐츠 앞에는 ‘Korea’를 상징하는 대문자 ‘K’가 붙었다. 고유명사처럼 ‘K’가 따라붙으며 콘텐츠 시장은 이미 공략 대상이 글로벌로 굳혀졌다. 이런 흐름에 과연 ‘지역’에 주목하는 창작자가 있을까?
발제를 맡은 박형웅 교수는 지역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K-콘텐츠의 현재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여러 통계 그래프들은 우리나라에서 잘 되는 콘텐츠가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콘텐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 지난해 글로벌 콘텐츠 시장규모 순위에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일본 등의 뒤를 이으며 8위를 기록했다. 다른 산업 분야와 비교하면 콘텐츠 영역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박 교수는 ‘K-콘텐츠, 지역에서 살아남기’라는 주제가 그만큼 어려운 난제라고 전했다. 박교수는 이를 세 가지 관점으로 바라봤다. 첫째는 지역에서 K-콘텐츠 만들기, 두 번째는 지역에서 창작자 키우기, 마지막은 지역에서 콘텐츠 소재 발굴하기다.
박형웅 전주대학교 교수
첫째, 지역에서 K-콘텐츠 만들기
지역에서 창작자라 불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박 교수는 로컬 크리에이터부터 웹툰 공모전 도전자, 어둠 속의 웹소설가, 인디게임 개발자, 유튜버를 꿈꾸는 청년들까지. 지역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역의 창작자라 정의했다. 안타까운 것은 잘 나가는 K-콘텐츠와 달리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는 사실이다.
창작은 원래 괴롭고, 외롭고, 알아서 생존하는 것이라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다. 능력 있는 창작자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환경이 조성된다면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완성도 높은 콘텐츠들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창작자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은 열악하기만 하다. 관련 지원사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럴싸한 포트폴리오 없이 스토리 하나만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는 등 증명된 사람만이 그나마 기회를 얻는다. 한마디로 창작자는 어떠한 보호 장치도 없이 각자도생해야 한다.
오펜 스토리텔러 8기(왼쪽)와 오펜 프로젝트가 제작 지원한 드라마 <슈룹>
둘째, 지역에서 창작자 키우기
CJ엔터테인먼트가 신인 창작자 발굴과 육성을 위해 조성한 ‘오펜’ 프로젝트가 있다. 오펜(O’PEN)은 창작자(Pen)를 꿈꾸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Open) 창작 공간과 기회(Opportunity)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콘텐츠 기획·개발과 제작·편성 등 전 과정을 통합적으로 지원한다. <갯마을 차차차>, <슈룹>, <대행사> 등 여러 화제작들이 실제 오펜 출신 작가들을 통해 탄생했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창작자를 키워낼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이 지역에도 조성될 수는 없을까? 박 교수는 이러한 역할에 지자체가 앞장서야함을 강조했다. 단순 공모전을 통해 손쉽게 창작자를 찾기보다는 새로운 창작자 발굴을 위해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역할을 지자체가 나서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면 자연스레 지역이 안고 있는 청년 유출 문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셋째, 지역에서 콘텐츠 소재 발굴하기
각 지역에는 콘텐츠 소재로 쓰일만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지역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 지원사업은 이미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박 교수의 의견이다. 소재를 한정지어 지원하면,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아쉬운 콘텐츠들이 생산되기 쉽다. 지역에 애정이 있는 창작자 스스로가 좋은 소재를 발견해 콘텐츠화 할 때 유연하게 지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설명이다.
전북이 주목하는 지역 특화 소재하면 한옥이나 한복, 한식, 한지, 판소리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의 활용은 지난 몇 십년간 이미 반복했던 것들이다. 실효성 없는 지원사업을 반복하기 보다는 지역에서 좋은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토론
공모사업용 게임 따로, 잘 팔리는 게임 따로
김회민 인디게임 제작자
저는 전주가 고향도 아니고 특별한 연고도 없지만 콘텐츠 지원사업에 신청하면서 이곳에 오게 됐어요. 한국의 역사를 소재로 게임을 만들어왔는데, 전주를 둘러보니 역사적으로 영감을 주는 곳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창작활동을 하기에 전주만한 곳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디게임 특성 상 적은 규모로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지역이라고 해서 큰 어려움은 없는데요. 지역을 소재로 한 기획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전주 한옥마을에서 민박집을 운영하는 이야기로 게임을 만든다면 전주의 명소들을 활용해 충분히 재밌는 게임을 제작할 수 있겠죠.
다만 지역에서 활동하며 느낀 아쉬운 점은 지원사업에 적합한 게임 기획과 잘 팔리는 기획은 다르다는 겁니다. 지원사업에 도전할 때 ‘이 게임이 출시됐을 때 자생적인 시장 경쟁력이 있는가?’ 묻는다면 완전히 물음표인 상태고, 반대로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게임은 지원사업에 선정될 가능성이 적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지원사업은 각 콘텐츠 시장의 특성을 고려해 현실적으로 운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각자의 사정과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쉽지 않은 문제지만 절충안을 마련해가야겠죠.
'언폴디드-동백이야기'(위)와 '청구야담-팔도견문록' 게임 이미지
지역 대학과 협업 통한 인재 양성
홍인근 웹툰 작가
저는 만화학원에서 강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웹툰 작가로 데뷔를 했어요. 그때 모아놓은 돈도 없고 막막한 생각에 지원사업을 찾아봤었는데, 전북에는 관련 사업이 하나도 없었죠. 광주랑 부천에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지원을 받아 작품을 낼 수 있었는데요. 저는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계속 생활한 사람으로서 고향에서 지원을 받지 못하고 다른 지역을 찾아다녀야한다는 점이 힘든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전북에도 웹툰캠퍼스가 생겨서 입주 작가로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고, 지원사업도 다양해져서 전과 비교하면 지역의 여건이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끼는데요.
웹툰 시장이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개인이 혼자 충분히 활동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스튜디오 형태가 자리 잡아서 작업별로 인력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지역 안에서 웹툰 작가들이 살아남으려면 어쨌든 인력을 꾸려야 하는 현실이죠. 그래서 저는 스튜디오화를 꿈꾸고 있어요. 지금까지 전북에는 웹툰이나 만화 전문과가 없었는데, 올해 전주대학교에 웹툰만화콘텐츠학과가 신설됐거든요. 대학과의 협업을 통해 인력을 양성하고 그들이 지역 안에서도 데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웹툰스튜디오를 만들면 어떨까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 혼자 힘으로 가능한 부분이 아니라 지자체와 대학교, 창작자 등 여러 가지 협업이 필요한 문제일 것 같습니다.
웹툰 '그슨대'(왼쪽), '괴이'
열린 창작으로 경쟁력을 갖추자
이은상 스토리텔링 기반 영상콘텐츠 제작자
게임이나 웹툰과 다르게 영상은 분업화가 필수이기 때문에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한편을 제대로 만들려면 40명 정도의 스태프가 구성되어야 합니다. 10명이서도 만들 수는 있지만 퀄리티는 확실히 떨어지죠. 그러다보니 인프라가 가장 첫째로 꼽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지역을 소재로 한 콘텐츠를 이야기한다면 거기서부터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외부에서 인력을 데리고 와 열심히 만든다 해도 소재 자체가 한정되어버리면 제작에도 당연히 한계가 생깁니다. 지역 자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 대신, 영상에 아름다운 한옥마을이 한 장면만 등장하더라도 사람들에게 가고 싶게끔 만들면 된다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만드는 것 자체가 지역 콘텐츠가 될 수 있는데, 창작의 테두리를 만드는 게 늘 아쉬운 것 같습니다.
웹드라마 '주식회사 거탑' 3화 썸네일(왼쪽), 임실 특화 웹드라마 ‘치즈스마일’ 촬영 현장
지역 콘텐츠, 관광만 앞세우지 말아야
최화평 로컬콘텐츠 사업 담당자
말씀하신 것처럼 정부나 지자체는 왜 지역을 소재로 하는 제작 지원사업을 자꾸 만들려고 할까,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은데요. 지자체에서도 처음에는 지역에 있는 창작자들을 키워서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려고 시도를 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러한 경우 개인은 살아날 수 있으나 지역의 내수는 돌아가기 어렵다는 판단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결국 지역 소재의 콘텐츠 지원사업 등은 관광산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의미겠죠. 지역 소재의 콘텐츠가 뜨면 자연스레 지역의 관광이 살아나고 지역 경제가 활성활 될 것이다. 이런 단편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현실입니다.
전북콘텐츠융합진흥원에서 현재 여러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정부 지원사업과 과제사업에 대한 분리가 확실히 이루어져야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두 기준이 애매하다보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면 투자나 지원을 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간단계에서 저희가 콘텐츠 전문 기관으로서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앞서 말씀해주신 창작자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지역 안에서도 좋은 콘텐츠가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라북도문화콘텐츠융합진흥원 주관의 전북 콘텐츠 산업 활성화 위한 '투자유치오디션'(왼쪽),
전북콘텐츠융합진흥원-전주대 웹툰만화콘텐츠학과의 웹툰작가 양성 업무협약 체결
K-콘텐츠 특성 살리는 실효성 있는 지원
박형웅 전주대학교 실감미디어혁신공유대학 교수
사실 우리나라보다 규모가 큰 국가들 중 콘텐츠 창작에 대한 정부 지원사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창작자들한테 국가에서 여러 형태로 지원을 해주는 경우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도 볼 수 있죠. K-콘텐츠가 지금의 수준까지 성장하는 밑바닥에는 정부의 이런 지원 사업들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국가에서 쓰는 예산 전체를 보면 콘텐츠가 차지하는 비율은 5~10% 정도도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산업에 비하면 문화콘텐츠에 투자하는 비율이 매우 적지만 K-콘텐츠에 거는 기대는 큰 현실이죠.
지원사업이라는 큰 카테고리 안에서 콘텐츠 창작에 대한 특수성이 반영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예산 처리 방식이나 지원 형태가 콘텐츠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되다 보니 창작자 입장에서는 어려움이 생겨요. 창작자가 최소한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콘텐츠 창작의 질을 높이는 교육을 진행하는 등 영역을 분리해서 바라봐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웅 전주대학교 실감미디어혁신공유대학 교수
게임, 로컬 리빙랩 프로젝트, 실감미디어 등 다양한 콘텐츠 분야를 연구하며 문화기술을 기반으로 한 지역 콘텐츠 연구에 앞장서고 있다.
김회민 인디게임 개발사 ‘코스닷츠’ 공동대표
정재령 공동대표와 함께 제주 4.3사건을 소재로 만든 어드벤처게임 ‘언폴디드: 동백이야기’로 이름을 알렸다. ‘청구야담: 팔도견문록’ 등 전국 역사를 소재로 한 게임을 주로 제작하고 있다.
홍인근 네이버 웹툰 ‘괴이’ 작가
2016년 T스토어 공모전에서 웹툰 ‘마운틴 스쿨’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2022년부터 현재까지 네이버 웹툰 ‘괴이’를 연재 중에 있다.
이은상 영상콘텐츠 제작사 ‘레터박스’ 대표
스토리텔링을 강조한 영상콘텐츠를 선보이며, 시트콤 형식의 웹드라마 ‘주식회사 거탑’을 제작, 현재는 임실의 지역 웹드라마 ‘치즈스마일’을 제작 중이다.
최화평 전북콘텐츠융합진흥원 로컬사업팀장
전북웹툰캠퍼스를 비롯한 전북콘텐츠코리아랩, 레드콘음악창작소 등을 운영하며 지역형 콘텐츠 산업에 관한 정책 및 지원사업 전반을 담당하고 있다.
정리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