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회 마당기행 |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 도시브랜드가 되다 ① 남해   2024.6월호

도시를 만나는 새로운 방법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는 섬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는 바다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타야만 했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 육지에 인접해 있는 사천이나 하동 어느 쪽에서든 육로로 오갈 수 있다. 남해는 오래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였다. 수학여행과 신혼여행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추억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절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였던 시설이 낡고 정체되자 사람들의 발걸음은 새롭게 떠오르는 관광지로 향했다. 이전의 활기를 되찾을 수 없을까. 남해가 선택한 방법은 '도시브랜딩'이다. 도시가 가진 고유한 역사와 자원을 활용해 이야기를 품게 된 남해가 새로워지고 있다. 


도시재생의 현장을 찾는 마당 도시기행. 마당은 올해의 첫 번째 도시기행을 떠났다. 지난 4월 27일 찾아간 곳은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이곳 남해다.





남해 관광의 모든 것이 모이는 곳 '남해각'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이자 동양에서 가장 큰 현수교로 이름을 알렸다. 지금은 아름다운 남해 바다를 그대로 만끽할 수 있는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남해대교를 건너면 남해의 관문과도 같은 '남해각'이 반긴다. 남해각은 해태그룹이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1975년 만든 건물이다. 여관과 오락시설 등이 들어서며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았다. 2018년 그 역할을 다하고 문을 닫은 후 유휴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21년 지금의 모습으로 리모델링되었다. 남해관광문화플랫폼으로 변신한 남해각은 도시브랜딩을 위한 남해군의 첫 번째 공간이다. 남해관광문화재단(본부장 조영호)이 운영을 맡고 있다.


건물 1층에 들어서면 남해각 아카이빙 전시가 먼저 눈에 띈다. 과거 이곳을 다녀갔던 관광객들이 그때의 추억을 꺼내볼 수 있도록 당시의 신문과 사진, 여관에서 쓰던 비품들을 전시했다. 남해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만들어진 지역 예술가들의 설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지하에는 남해 관광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안내소가 있다. 제휴 숙박시설과 맛집들의 할인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으며, 로컬기업들이 제작한 남해 기념품도 구매할 수 있다. 2층에는 당초 열린 도서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해에서 발행하는 관광달력이 10주년을 맞은 것을 기념하여 새롭게 기획한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문화,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남해각



남해, 새로운 관광 도시를 꿈꾸다

남해관광문화재단은 남해각 활성화와 함께 도시브랜딩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 진행하고 있다. 재단을 이끌고 있는 조용호 본부장은 오랜 시간 전주시 관광마케팅팀장으로 일하며 한옥마을의 발전을 이끈 관광 전문가다. 그는 남해의 관광 산업이 갖고 있는 의미를 강조했다. 남해는 하동, 광양 등 인근 도시와 비교해 공장이 적다. 대신 군민의 70퍼센트가 관광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일부는 농업과 어업 등 1차산업 종사자이다. 남해에서 관광이란 그만큼 지역과 밀착되어 있으며, 관광산업의 성패가 지역민의 삶과 이어져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남해의 관광 산업은 점점 위축되어 갔다. 과거 만들어진 시설들이 노후화되고,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명소들이 개발되며 관광객들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2020년을 전후한 팬데믹의 영향으로 관광산업 자체가 크게 흔들렸다. 남해군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지였다는 영광을 되찾기 위해 2021년 지자체 최초로 관광전문재단을 출범시켰다. 재단은 관광 산업을 다시 일으키는 방안으로 ‘도시브랜딩'을 채택했다. 바래길, 다랭이논, 독일마을 등 기존에 남해가 가진 고유의 자원과 역사를 통해 다른 지역과 구별되게 하는 고유의 이미지를 쌓아가는 정책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개발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일환으로 남해각을 리모델링하고 독일마을에 마을호텔을 오픈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실행하면서 관광 거점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독일마을



파독 한인들이 꾸미는 마을호텔 '독일마을'

알록달록한 주황색 지붕의 집들과 거리 곳곳의 맥주 가게. 유럽의 시골 마을을 찾은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이곳은 남해의 상징이 된 독일마을이다. 20년 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에 돌아와 정착할 수 있도록 조성된 이곳에서는 해마다 가을이면 맥주축제가 열린다. 지금은 한 해 축제 기간에만 5만여 명이 방문하는 대표적인 축제가 되었다. 독일마을은 남해를 대표하는 관광지이지만 주민들이 고령화되고 시설도 노후화되며 운영에 어려움이 생겼다. 재단은 이들 독일마을 민박집 25곳을 연계해 최근 '마을호텔'을 오픈했다.


마을호텔은 공주, 목포 등 지난해 진행한 마당의 도시기행에서도 보았던 도시재생의 한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대도시에 본사를 둔 호텔들은 수익이 지역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텔 본사에 돌아가는 방식이지만, 마을호텔은 수평적인 형태로 마을에 있는 주민이 직접 호스트가 되어 수익을 가져간다. 로컬기업이 만든 어메니티를 제공하고,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조식을 먹을 수 있는 방식을 연계해 지역 자체의 사업으로 정착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국비를 지원받아 조성된 독일마을 마을호텔 사업은 남해관광문화재단이 주도하고 있다. 재단은 국비 지원이 끝난 뒤에도 지속될 수 있도록 주민들의 자체 조직인 독일마을운영위원회의 운영 역량을 키워가고 있다. 그전까지는 재단이 고령화된 주민들을 대신해 전문적인 홍보와 마케팅, 기획을 진행하며 마을호텔의 안정화를 이끌어 갈 계획이다.



청년센터 바라



청년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도록 '청년센터 바라'

남해군은 청년의 기준을 19세에서 45세로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청년기본법상 청년 기준이 34세까지인 것을 생각하면 폭이 넓다. 남해군은 청년 인구가 외부로 나가면서 세대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이 지속되자 청년의 기준을 완화하고 그에 맞는 청년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행정이 그렇듯 지자체가 정책을 만들어도 실제 주민들이 활용하기까지의 거리는 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이 만든 것이 '청년센터 바라'다. '청년센터 바라'는 행정과 청년을 연결하는 좋은 다리다. 남해 청년과 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행사를 운영하는 열린 공간이다. 바라를 총괄하고 있는 공은지 팀장은 이 공간을 남해 청년들의 삶을 보다 더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청년센터 바라는 원도심의 작은 골목길 사이 낡은 주택을 개조하여 2020년 개관했다. 아름다운 연못 정원과 고즈넉한 한옥의 청취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청년들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이나 관광객들에게도 좋은 쉼터가 된다. 청년들이 자유롭게 와서 일할 수 있는 코워킹스페이스와 독서 공간, 다양한 모임을 진행할 수 있는 멀티라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시와 공연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다.


바라는 공간 운영 외에도 다양한 행사와 프로그램들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주 2회 청년 관련 소식을 보아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으로 공유하는 프로그램은 실제 남해 청년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청년들이 자신만의 클래스를 만들어 재능을 나누는 '아무끼나 프로그램'도 인기가 좋다. 강의자에게는 창업 전 사전 조사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외에도 차를 마시며 남해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차담차담', 남해 청년 소식지 '물떼새 통신' 제작, 센터의 아름다운 정원을 활용한 작은 음악회 등 끊임없이 지역의 청년들을 연결하고 있다.




청년센터 바라



문화가 아카이빙되는 공간 '라키비움 남해'

‘라키비움’은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이 합쳐진 공간을 말한다. 최근 복합문화공간들이 지역문화의 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가운데, 라키비움 남해도 그러한 복합문화공간을 표방하며 2023년 2월 문을 열었다. 베이커리 카페, LP 박물관, 도서관, 갤러리가 함께 있으며 특히 베이커리 카페는 오래된 공간을 리모델링하여 카페로 운영하는 '브라운핸즈'의 14개 지점 중 하나다.


건물은 두 개로 나뉘어져 한쪽은 베이커리, 한쪽에서는 카페를 즐길 수 있다. 카페 1층에 들어서면 브라운핸즈의 굿즈들과 LP플레이어가 눈에 띈다. 안쪽으로는 MBC경남이 보유한 1만 1천여 장의 LP가 벽면에 빼곡히 전시되어 있다. 2층은 갤러리로 꾸며져 연중 미술품 전시가 이루어진다. LP 음악을 주제로 한 강연, 인디밴드 콘서트, 버스킹 등 다양한 문화 공연도 브라운핸즈의 주최로 이곳에서 열린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작년까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행사들이 올해부터 중단 상태라는 부분이다. LP 전시 또한 단순히 작품을 나열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아 '라키비움'으로서 지속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세심한 기획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냉동창고의 재탄생 '스페이스 미조'

미조항은 남해에서 가장 큰 항구로 멸치와 삼치, 갈치 등이 많이 잡히는 남해 수산업의 중심이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는 이곳에 냉동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미조'가 있다. 1986년 건축된 냉동창고는 얼음을 만들어 선박에 공급하고, 수산물을 얼리는 데에 사용한 주요 산업시설이었다. 하지만 시설이 노후화되고 새로운 냉동창고가 만들어지며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다. 방치되던 냉동창고를 남해군이 매입했고, 여기에 '돌창고 프로젝트'(대표 최승용)가 2년간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새로운 콘텐츠를 입혀 대형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남해의 특산물을 이용하여 만든 여러 먹거리와 굿즈에 전시와 공연 등 문화생활까지 즐길 수 있다.



스페이스 미조


전시와 공연의 공간인 '와프(WARP)'에서는 마침 사진가 신혜림과 음악가 김성경이 함께 만든 전시 'Punctuation, 너와 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냉동창고로 활용되던 당시의 원형이 건물 곳곳에 남아있어 일반적인 문화공간과는 다른, 차가우면서도 역동적인 느낌이 작품에 고스란히 입혀지는 듯했다. 특히 높고 큰 통창을 통해 건물 너머 산과 항구의 모습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점이 색다르다.


2층의 '플랫포트샵'에서는 스페이스 미조의 굿즈를 비롯하여 멸치 액젓, 엔초비 등 다양한 지역 특산물을 만날 수 있었다. 냉동창고였다는 특성을 살리기 위한 공간 구성이 돋보였는데, 특히 어상자를 이용해 만들어진 매대가 인상적이었다. 플랫포트샵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지역의 생산자들과 협업하여 제품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어민들은 품질 좋은 해산물을 제공할 수 있지만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이나 마케팅의 영역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그러나 여기에 스페이스 미조의 전문적인 기획이 더해지자 젊은 사람들도 구매하기 좋은 '힙'한 특산물로 느껴졌다. 4층의 브런치 카페 '플랫포트'에서는 남해에서 잡은 해산물을 이용한 특별한 요리들을 맛볼 수도 있다.



천천히, 느리게 만들어 가는 도시

도시브랜딩을 통해 관광도시로서 다시 한번 급부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행에서 만난 남해 사람들은 속깊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독일마을을 비롯한 일부 유명 관광지만 방문하여 원도심은 오히려 점점 쇠퇴하고 있다는 것.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앞서 만난 남해관광문화재단, 청년센터 바라를 비롯해 다양한 중간지원조직들이 협력하여 해결 방안을 찾고 있지만 쉽지 않다. 민간이 운영하던 시설들이 위탁 기간이 끝난 이후 상황이 불투명해지는 것도 문제다. 미조면에 있는 설리스카이워크는 수수료를 제대로 징수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민간 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되자 결국 남해관광문화재단이 운영을 맡게 됐다. 스페이스 미조 또한 곧 돌창고 프로젝트의 위탁 종료 시점이 다가와 이후의 운영 방침에 대해 고민 중이다.


이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지고 있는 고충이기도 하다. 관광지나 신시가지가 개발되면 원도심은 유동 인구가 줄어들어 자연스레 쇠퇴한다. 지자체의 예산을 투입하여 하드웨어를 구축한 이후, 정작 소프트웨어를 운영할 주체를 찾지 못해 잘 만든 건물이 애물단지가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다. 한 도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당장 눈앞의 성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조금은 느리고 점진적인, 그리고 철저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글·사진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