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김용택.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하루에 한 편씩 매일 짧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후부터 아침 산책을 마치면 책상 앞에 앉아 계절의 장면들을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 그 기록이 모여 한권의 책으로 엮어졌다. 시인이 5년 만에 내놓은 산문집 『아침산책』(나남)이다.
지난 11월 13일, 시인의 신작 에세이 『아침산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열렸다. 마당이 기획한 출간 기념 북토크 ‘삶은 하염없지 않다’. 시인이 교사 시절 담임 선생님과 제자로 만나, 그 또한 지금은 시인이 되어 같은 길을 가고 있는 하기정 시인이 북토크를 진행했다. 웃음과 감동이 넘쳐났던 이 날 이야기의 일부를 지면에 옮겼다.
하기정
올해 늦봄에 시집을 내고 가을에는 또 『아침산책』이라는 선물을 내셨어요. 매일 새벽에 일어나 돌다리를 건너 산책을 하고 매일매일 글을 쓰셨다고요.
김용택
코로나가 유행할 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새해부터는 아침 산책을 하고 매일 글을 한 편씩 써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2년 동안 하루에 한 편씩은 꼭 글을 썼습니다. 아침의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씩 써놓고 모아보니 글이 되어서 이 책을 만들었어요. 산문집을 내니 내 삶을 비로소 완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들을 통해 내 삶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고 안정감을 얻은 것 같습니다.
하기정
선생님의 산문은 군더더기 없이 문장이 굉장히 짧고 명징합니다. 산문이기도 하지만 시 같기도 하고요. 시와 산문을 쓰실 때 사용하시는 감정의 근육도 다른지 궁금합니다.
김용택
김수영 시인이 그랬죠. “시인은 어떤 글을 쓰든 시처럼 써야한다”고. 오래 전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늘 꺼내서 다시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시와 산문을 구분하지 않고 ‘시처럼 쓴다’는 생각으로 씁니다. 그래서 산문에 실린 글들이 다른 시집에 들어있기도 하죠. 아침은 아직 세상 일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별 갈등도 없고,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쓸 수 있는 시간이 돼요. 구태여 구분하지 않고 그냥 보고 느낀 대로 씁니다.
나무는 정면이 없다.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다.
나무는 어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다.
─『아침산책』 새들의 시 中
김용택
이 시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시입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묵혀놓고 마지막 구절이 정해지지 않아 발표를 못하다가 지난 시집에 수록이 됐습니다. 제가 저희 집 앞에 나무 한 그루를 심어 가꾸고 있는데요. 그 나무를 계속 보며 살다보니까 나무는 정면이 없었습니다. 나무는 바라보는 쪽이 곧 정면이죠. 그런데 우리는 하나의 정면만 바라보고 살잖아요. 일단 자본을 바라보며 삽니다. 자본 위의 것들은 잘 보지 않아요. 학교에 가면 1등을 해야 하고. 정면이 늘 정해져 있어서 힘들죠. 저는 그게 참 괴롭습니다. 나무는 경계가 없기 때문에 차별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다. 이런 차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죠.
하기정
산문집에는 새들이 정말 많이 나옵니다. 제가 한번 열거를 해봤는데요. 비둘기, 참새, 까치, 파랑새, 꾀꼬리, 물새, 뱁새 물까치, 물오리, 딱새, 원앙 등 진메마을의 새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김용택
제가 크게 감동했던 날이 있어요. 어느 날 걷다가 소리가 나길래 뒤를 돌아봤더니 뱁새 한 마리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작고 까만 눈과 얼굴이 너무 차분했어요. 하루 종일 새의 눈빛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뛰었죠. ‘누군가 나를 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직접 촬영한 아침산책 중의 풍경
하기정
<새로 태어나는 말>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 자리의 제목이기도 한 ‘삶은 하염없지 않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작가에게 있어 중요한 말이기도 한데요. 선생님은 40년이 넘도록 시를 쓰고 계시잖아요. 매일 보는 풍경이 지루할 법도 한데 시를 읽어보면 언어를 발견만 하는 게 아니라 ‘발명’하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을 항상 새롭게 보는 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김용택
제가 학교 다닐 때는 동네에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워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어요. 스물두살부터야 책을 읽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읽는데 너무 재밌어서 일곱 권을 다 읽었어요. 그리고서 마을을 걸어가는데, 22년 동안 매일 본 느티나무가 그날 처음 본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산 능선이 저렇게 아름답다니, 물가에 있는 바위들이 저렇게 균형 잡히게 자리하다니.’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워 보였죠. 그때 ‘아! 새로워 보이는 것이 사랑이구나.’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77년을 바라봤던 앞산이 한 번도 지루한 적이 없어요. 똑같은 나무는 세상에 없기 때문이죠. 나무는 봄이 되면 늘 새로운 시를 저한테 써서 보여줬고, 새로운 정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평생을 바라본 저 나무가 저를 상상하지 못한 세계로 데려가면 지금도 저는 거듭 새로운 세계로 갑니다. 그러니 저 나무를 바라보는 그 순간은 죽어야 내일 또 새롭게 보이는 것이죠.
북토크를 마치며 한 독자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시인처럼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고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시인은 ‘그냥 시를 열심히 읽는 것뿐’이라는 간단한 답을 건네며 한 줄의 시, 문장 속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시를 사랑하여서
나는 이제 어느 계절이 와도
부러움이 없구나.’
시를 사랑하여 세상에 부러움이 없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글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