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개인전 연 작가 박진희  2025.2월호

딸이 바라본 모든 어머니의 시간


박진희




‘밀감밭에 나가 일 허당 눈물 나고 울당 웃당 허멍 살았지. 허벅지고 새벽이슬 헤치며 물통다닐 때 생각허민 어떻게 그리 살았나 싶지.’ 


주름진 어머니의 손아래,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가 담겼다. 작가 박진희의 전시 <이윽고 슬어드는>에서 만난 풍경이다. 1월 17일부터 27일까지 사용자공유공간 PlanC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작가가 제주에서 살아가며 기록한 어머니들의 시간을 다양한 설치작품으로 펼쳐냈다. 12년 만에 고향인 전주에서 갖는 개인전이기도 하다. 


지난 2013년, 작가는 건강상의 이유로 나고 자란 전주를 떠나 제주로 향했다. 그곳에 천천히 녹아들며 자신의 몸에 맞는 재료를 찾았다. 그렇게 7년 남짓의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 비로소 지금의 재료를 만났다. 동망과 실, 바닷물이었다. 작가는 동망을 캔버스 삼아 물감 대신 바닷물로 그리고 금실을 바느질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새겨 넣는다. 바닷물이 어떻게 물감을 대신할 수 있을까. 그는 10여 년 동안 제주에서 마주한 할머니들의 생애를 깊숙이 들여다보며 자신만의 답을 찾았다. 


“감정마다 눈물의 염도가 다 다르다고 해요. 분노할 때나 슬플 때, 기쁠 때 염도가 다른 것처럼 이걸 소재로 감정들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주에서는 어머니들의 삶을 바다가 다 안고 있고, 그 속에 모든 감정들이 담겨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바닷물을 떠올리게 되었죠. 동망은 금속이다 보니 바닷물을 만나면 산화작용을 해요. 처음에는 투명한 물길을 만들며 그리다가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연한 회색이 되고 연둣빛이 되고, 100일이 지나면 온전히 파란 바다의 빛이 올라오게 됩니다.”




낯 꽃




바닷물이 그려낸 굴곡진 손 하나하나는 생을 지탱해 온 어머니들의 초상화와 같다. 멀리서 보면 주름진 손들이 모여 하나의 산맥 같기도 하다. 이외에도 동망 위에 그들의 이야기를 한 글자씩 새기고 오려낸 작품 '베인 눈물의 서시'와 어머니들의 생과 죽음, 삶의 춤을 날개옷으로 표현한 '활의 춤' 등 그의 작업들은 '우리'라는 주어로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호명하고 있다. 


“저에게 어머니는 북극성 같은 존재에요. 북극성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잖아요. 저도 이제 엄마가 되었고, 딸에게 북극성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엄마’라는 단어는 들으면 울컥하고 애잔한 감정이 먼저 들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감정들보다는 우리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그 이면을 봤으면 좋겠어요.”




베인 눈물의 서시




작가는 그동안 여성에 주목한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번 전시 역시 ‘어머니’를 통해 연결되는 여성 서사의 연장선이다. 그는 제주 살이 속 다양한 활동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불러냈다. 탐라미술인협회와 제주여민회, 상상창고숨에서 창작 활동을 하며 제주 여성의 삶을 담아낸 전시 <살림하는 붓질 전>, 아픈 역사 속 여성들을 기억하는 <4.3미술제> 등을 매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작지만 큰 메시지 하나를 전하고 싶다. 무엇이든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 세상에 하찮은 존재는 없다는 삶의 지혜를 우리 어머니들의 삶, 여성들의 삶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어머니들은 사실 누구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몰라요. ‘슬픔은 무섭지 않어. 나대로 못 살면 서러운 거지.’라는 말씀을 하시거든요. 그게 바로 주체적인 삶이에요. 저는 그들에게 당신들의 삶이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는 말을 계속해서 전달하고 싶어요.”


지난해부터 개인 작품 활동에 본격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그는 올해도 <이윽고 슬어드는>의 연작 작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다가오는 봄 앞두고 있는 4.3미술제 준비로도 분주하다. 그의 움직임으로 ‘아픈 역사 속에 묻혀있는’ 더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세상 밖에 나오길 바란다.



글ㆍ사진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