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025.3월호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모이다

故 박배엽 시인을 기억하기 위하여



문신 시인·편집위원




시인으로 살고자 했으나, 시가 되어버린 사내. 박배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문학적인 수사가 아니다. 시를 쓰기보다는 시로 살아버렸기 때문에, 박배엽의 시보다는 박배엽이라는 삶을 기억한다. 감히 시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는 20세기의 후반을 그는 진짜 시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했다. 시대와 삶과 시의 삼위일체를 꿈꾸었고, 자기 꿈을 하나의 혁명처럼 믿었던 박배엽. 그가 없는 지금, 그의 시와 삶과 그와 살 부비며 살았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오로지 박배엽이라는 이름을 부르기 위하여.


2025년 2월 8일. 전날 내린 폭설로 세상은 하얗게 숨을 죽였고, 낮게 엎드린 숨결들 사이로 뜨거운 숨결들이 스며들었다. 고 박배엽 시인의 21주기를 맞아 모인 사람들이다. 금산사를 왼쪽에 끼고 눈 쌓인 등산로를 한 걸음씩 디뎌 걷는 이들의 어깨 너머로 세상의 뿌리를 품은 듯한 모악산이 보였다. 한바탕 폭설을 퍼부어낸 하늘은 서슬푸르게 맑았고, 그 하늘을 받치고 선 대숲은 시린 바람을 품었다가 날려 보내기를 반복했다. 오후 3시에 금산사 입구 주차장에서 모여 함께 나선 길이지만, 굳게 다문 표정들만큼이나 박배엽 시인과의 인연은 각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박배엽이라는 이름이 연출해 낸 그날의 풍경은, 희고 차가운 겨울이었다.



겨울 속에 겨울 속에 겨울 아닌 새날이

겨울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정한가. 열 번만 소리내어 발음해 보면, 겨울이 자기 안에 얼마나 다정한 꿈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된다. 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혹독함이 사실은 가장 여린 꿈을 보호하려는 본능이라는 걸 겨울을 견디면서 깨닫는다. 그런 겨울의 모습으로 한 시절을 살았던 사람을 찾아가는 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걸음의 보폭이 젊은 날보다 줄어든 사람들은 박배엽 시인의 고등학교 동창들이다.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은 젊은 날 박배엽 시인과 더불어 시대와 삶과 문학을 고민했던 문우들. 그다음은 전북 문단에서 이런저런 사연으로 박배엽 시인과 연을 맺은 이들이다. 모악산 마실길을 따라 내딛는 걸음이 흰 눈을 꾹꾹 다져놓는 동안 시인 박배엽의 삶 한 자락을 서둘러 더듬는다.




전북대 대학로 '새날서점'에서 박배엽 시인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 위

당신이 스치는 바로 그 인파 속

당신의 나날 당신의 노동 당신의 식사

오늘 지친 바로 당신의 육신 속에서

광주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광주를 불러 일으키지 않고

어찌 광주를 만날 수 있겠는가

광주의 투쟁 광주의 승리

찬란한 광주의 첫 새벽을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목숨을 건 전의 없이

분노 없이 적개심 없이

당신과 내 어깨의 튼튼한 연대 저 견결한 

설레임도 없이

식민지 민족해방 치켜든

큰 깃발도 없이


-박배엽, 「광주」 부분



박배엽 시인 21주기 추모식 자료집에는 박배엽 시인의 시 10편과 산문 2편이 실려 있다. 그게 박배엽이 남긴 작품의 전부다. 「광주」는 전북민족문학인협의회 회보 창간호(1991년 6월 20일)에 실렸는데, 이 시는 그 자체로 혹독한 겨울 형상을 한 박배엽의 모습이다. ‘내 나라 내 땅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나는 백두산 안 갑니다.’라고 통일된 나라의 백두산에 가고 싶다고 절규한 박배엽(1957~2004). 시집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늘 시를 쓰는 자세로 한 편의 시가 된 참된 시인 박배엽. 그는 1985년 「남민시」 1집에 시 「고부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그의 삶은 시보다는 시대의 참혹과 아픔을 더 자주 써내려갔다. 80-90년대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비롯해 새길청년회, 비전향 장기수 후원 운동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민주 시대를 위한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 같은 혁혁한(?) 활동으로 1991년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구속되었던 그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14년간 전북대학교 대학로에서 사회과학·시집 전문책방 <새날서점>을 꾸리기도 했다.


‘새날’이라니. 박배엽에게 ‘새날’은 어떤 의미였을까? 80년대의 암울했던 어둠을 찢어발기고 맞이할 새로운 아침이었을까? 아니면 그 시절을 온몸으로 버티고 싸우기 위해 밤으로 낮으로 서늘하게 벼려냈던 새로운 (칼)날이었을까? 유강희 시인은 “배엽이 형의 시 「백두산 안 갑니다」를 읽고 찬물을 뒤집어쓴 듯 맑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신의 날을 벼려야만이 새날이 온다는 의미로 그 의미를 새겼던 것 같습니다.”라며 새날을 기억했다. 그렇게 흰 눈밭에 새날을 새기듯 힘주어 걷는 발걸음이 마침내 그의 마지막 자취 앞에서 멈추었다.


 



추모식(왼쪽)과 시낭송하는 박두규 시인




기억하려고 모인 사람들

더운 걸음을 멈추고 둘레를 이루고 섰으나, 어쩔 것인가. 그리운 마음을 앞세우고 왔지만, 그곳에 박배엽은 있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 있을 리가 없다. 박배엽은 이미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 마음에 들어 있으므로. 따라서 그날 그 자리에는 오십 명도 넘는 박배엽이 저마다의 인연을 떠올려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었다. 추모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오는 동안 1976년 전주우체국 근처 꽃집에서 만났던 박배엽과의 일화를 떠올렸다는 친구 이두엽, 박배엽에게 얻어먹은 게 많고 얻어들은 게 많아서 늘 친구 이상으로 여겼다는 박두규 시인. 박두규 시인은 친구 박배엽을 그리워하는 시를 여러 편 썼고, 그 자리에서 한 편을 낭송했다.



그를 잃고 여느 짐승들처럼 겨울잠에 들고 싶었다. 스스로도 잊고 혹독한 바람에도 깨어나지 않는 오랜 침묵이 되고 싶었다. 무심한 계절이 숱하게 지나가고 저물어 가는 산들의 어둠 사이로 그와 함께 다녔던 길 하나가 살아남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홀로 빛나는 것들에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박두규,  「친구-박배엽」  부분

 


다큐멘터리 영화 <미안해, 전해줘>를 통해 박배엽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다녔던 신귀백 영화감독은 2004년 겨울 이야기를 꺼냈다. 한없이 작은 눈송이들이 바람에 날리던 날, 박배엽의 몸을 태우던 승화원에서 목 놓아 서럽게 몸부림으로 울었던 박영근 시인을 떠올렸고, 그날 살아남은 사람들이 눈을 맞으며 모악산에서 박배엽을 배웅하던 일을 회상했다. 박배엽 시인과의 일화를 소설 「오래된 잉태」에 담아낸 한상준 소설가는, 그 소설을 보여주었을 때 “배엽이가 별다른 얘기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라며 소설의 마지막 단락을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내 몸 하나 마음 놓고 부릴 수 있는 단계의 자유는 허용되어 있기에…” 소설 속 화자의 말처럼, 박배엽 시인은 ‘자유’주의자였고,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누구보다 열렬히 그의 자유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다.


강형철 시인은 박배엽의 시를 모아 ‘열 편의 시’라는 제목으로 출간하기를 제안했다. 그래야 박배엽 시인의 모습, 얼핏 물렁해 보이지만 가장 단단한, 미적 변화가 막 일어날 때 어디로 가는지도 알고 있는 한 시인의 이야기가 좀 더 넓게 살아갈 수 있겠다고 말했다. 추모식 내내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박기영 시인은 배엽이 형과의 인연을 끄집어냈다. 하재봉 시인을 통해 전주에서 박배엽 시인을 처음 만난 박기영 시인은 5, 6년 동안 대구에서 전주로 박배엽을 찾아왔다. 한벽루에서 오모가리탕을 먹고 순두붓집에서 땡깡 부리던 일. 이광웅 선생을 만나러 가서 술을 마셨던 일 등 전주 추억의 3분의 1은 배엽이 형과 함께였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시 「삼백집에서-배엽 형에게」를 마른 삭정이 같은 목소리로 읽어내려갔다. “1979년 겨울/지금은 죽고 없는 배엽이 형 만나러/전주 풍남다방 가는 길/상복처럼 검게 염색한 야전잠바 입고/우린 만나자마자 삼백집으로 가/해장술을 마셨다/부뚜막에는 시대의 고민 같은 뚝배기들 수북이 쌓여/밤새 속 풀지 못한 젊음을 기다리고/수상한 바람 유리창 밖 서성이며…”


그날처럼, 2025년 2월 8일 오후 4시. 고 박배엽 시인 21주기 추모식에는 여전히 수상한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었다.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박배엽 시인에 대한 그리움을 영원히 풀어내지 않을 것처럼 꽁꽁 마음을 동였다. 한파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느슨하게 하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그것은 고 박배엽 시인이 보여주었던 시대와 삶과 문학의 자세와 같았다. 그 자리에 그런 자세로 서 있었던 이들의 이름을 여기 적어둔다. 강형철·김근혜·김성철·김수예·김영춘·김저운·도혜숙·문신·박기영·박두규·신귀백·신병구·안준철·오은숙·유강희·이경옥·정동철·정숙인·최기우·한상준 등 문학인, 고남규·김근수·김백기·김장원·김재욱·김태섭·박진문·배선수·양영주·이두엽·한긍수 등 고교 동창생들이다. 혹시 이름이 없더라도 상심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날 그 자리에 누가 와 있었는지 그는 다 알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