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이 개봉 55년 만에 도마 위에 올랐다. 주연배우 올리비아 핫세와 레너드 위팅이 당시 감독에게 속아 노출 장면을 촬영했다는 이유로 영화사를 고소한 것. 피부색 옷을 입기로 한 장면은 촬영 당일 나체로 연기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맨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카메라를 조정하겠다고 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례처럼 노출 및 베드신에서 배우가 제대로 보호되지 않는 일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미투 운동을 계기로 할리우드에는 변화가 생겼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 이하 IC)의 도입이다. IC는 영화, 드라마, 공연 현장에서 노출 및 베드신 촬영시 배우를 보호하면서도 제작진이 창작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전문가다.
5월 2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IC에 대해 이야기하는 포럼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는 불청객이 아닌 동반자입니다>가 열렸다. 한국 1호 IC인 권보람씨와 권잎새 배우, 임선애 감독이 패널로 참여했으며 사회에는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가 함께했다.
출처:IDC(Intimacy Directors&Coordinators) 홈페이지
안전하고 존중받는 촬영을 위해
IC는 비교적 최근에 정착되기 시작했다. 2020년 미국배우조합(SAG-AFTRA)이 관련 가이드라인을 발표했고, 2021년부터 교육 프로그램 인증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프로그램 이수자는 성 감수성, 트라우마 인식, 동의의 개념 등 현장에서 필요한 내용을 약 4개월간 배우고, 실습 과정을 거쳐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권보람 씨는 십여 년간 영화 현장에서 프로듀서로 활동해 오다 2024년부터 IC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촬영 이전부터 시작된다. 시나리오에서 노출 장면이 모호하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기에 배우와 제작진 사이에서 노출 범위나 촬영 방식 등을 조율한다. 노출의 구체적인 범위, 상체까지 이루어질 경우 속옷 착용 여부 등의 세부 사항을 계약서에 명시하도록 돕는다.
IC의 활동은 성행위 장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목욕, 출산, 모유 수유, 수술 장면 등 배우의 신체 노출이 예상되는 모든 장면에서 협력이 가능하다. 이외에도 '모더스티 가먼트(Modesty Garment)'라 불리는 신체 보호 의상의 착용을 지원하고, 상황에 따라 동작 코칭도 맡는다. 또한 노출 장면을 촬영하는 배우뿐 아니라 상대 배우와 현장 제작진까지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권보람
감독과 배우 사이, 더욱 원활해진 소통
국내에서는 영화 <갈비뼈>(감독 임하연)가 최초로 IC와 함께 작업했다. '이봄' 역을 맡은 권잎새 배우는 포럼에서 당시의 경험을 공유했다. 대본 리딩 단계부터 IC가 함께했으며, 콘티를 보며 내용에 대해 배우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촬영 현장에서도 배우의 감정 상태와 컨디션을 지속적으로 점검했다고 한다.
IC가 협력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제작진 입장에서도 정신적 부담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IC는 소통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또한 권잎새 배우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와 협력한 경험이 다른 영화 촬영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전했다. 현장에서 예상과 다른 노출 장면이 있을 때 잠시 촬영을 멈추고 감독님과의 대화를 요청할 수 있게 됐다는 것.
배우 권잎새, 감독 임선애
IC의 정착, 비용 지원 논의되어야
임선애 감독은 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해 다룬 영화 <69세> 등 다수의 작품을 연출한 경험을 바탕으로 IC의 필요성을 실감했던 현장 경험을 공유했다. 현재 영화 현장에서는 IC의 역할을 의상감독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다. 보호 의상을 준비하는 역할이 IC의 업무와 겹치기 때문이다. 임 감독은 이러한 역할이 전담 직군으로 세분화된다면, 제작진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고 현장 운영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 입장에서 가장 큰 고민은 결국 비용 문제라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저예산 독립영화의 경우에는 영화진흥위원회 같은 공공기관에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고용 시 일부 금액을 지원해주는 제도 도입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딥페이크 기술로 장면을 촬영하는 경우나 대역 배우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IC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기술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배우 보호를 위한 새로운 기준이 요구되고 있고, 이에 따라 영화계 내에서도 IC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추세다. 실제로 이날 포럼 현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참관인들이 자리하했다. 관련 연계나 협업을 희망하는 제작진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을 통해 문의할 수 있다.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