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2026.1월호

전주 노포 술집 ‘새벽강’과 숱한 은자들


최기우 극작가


술보다 예술에 먼저 취하는 ‘새벽강’

“전주에서 살겠다고 마음먹은 건 20대 중반 새벽강에 다니면서다. 서로 다른 장르가 한 공간에서 얽히고, 잔을 부딪치며 작업의 궁리를 나누고, 말보다 시선이 먼저 깊어지는 자리들에서 조금씩 ‘예술가라는 존재의 방식’을 배웠다.”(장근범 사진작가)


전주의 오래된 술집 새벽강(대표 강은자)은 어떤 곳일까? 90년대부터 이곳과 인연을 맺은 이경진 시인은 “작은 공간에 어떻게 이렇듯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많은 것이 모여 있는지 새삼 신기한 곳”이라고, 2015년 이곳에서 첫 개인전을 연 김누리 작가는 “작은 방에서 혼자 작업했는데 은자 언니 덕분에 멋지게 데뷔했고, 남부시장에 작업실을 얻는 용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1993년 전주고 담길의 무허가 건물에서 시작한 새벽강은 동문거리(1994∼2016)와 차이나거리(2016∼현재)로 장소를 옮기며 33년째 전주 예술가들을 품고 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토론과 입씨름, 굿판과 즉흥 공연, 불안과 외로움과 실패와 고민을 털어놓는 밤들, 작가의 길에 선 이들에게 위안과 위로를 주는 사람들. 새벽강은 혼자 가도 누군가와 어울리게 되는 술집이며, 전주의 예술적 기운이 농축된 ‘비공식 예술학교’이자 전주의 자부심이다. 


세상에 내놓은 ‘새벽강’의 그림들

“가난하고 자기 작업에 치열한 젊은 예술가들의 밥을 해 주기도, 특히 그림 그리는 녀석들 전시장 오픈식 상을 차려주기도, 그들의 작품을 사주며 어깨를 다독여 주기도 했는데, 그렇게 쌓인 작품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박남준 시인 페이스북에서 발췌)


새벽강이 소장한 미술 작품을 한곳에 모은 전시 ‘은자전’이 지난 12월 6일부터 14일까지 전주남부시장 내 로컬공판장 모이장에서 열렸다. 전시장은 91명의 미술 작품 231점과 사진·영상·장식물·편지·포스터 등 새벽강을 드나든 이들이 남긴 갖가지 흔적으로 채워졌다. 이것은 새벽강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풀어낸 구구절절한 이야기이자, 그곳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전주 예술 공동체의 마음이 모인 결과다. 


새벽강의 작품 소장은 1993년 당시 재수생이던 박진희(화가)의 실내장식용 소품을 무작정 사준 것이 시작이었다. “그때 힘든 애들밖에 없었으니까!”라는 것이 은자 씨의 조심스러운 고백. 그 후 돈 없는 예술가들에게 그냥 내주던 계란말이와 청국장, 열무김치처럼 여러 이유로 그림이 쌓였다. 대개 젊은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하며, 대중의 눈길을 받지 못한 그림을 산 것이다. 켜켜이 쌓여가던 그림은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나눴다. 그래서 전시장에 걸린 231점은 선물로 받았거나 나누지 못해 가지고 있는 작품의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다. ‘은자전’은 2000년 ‘곽승호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6년 ‘김춘선 개인전’까지 술집 벽을 활용해 열었던 ‘새벽강 기획전’처럼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새벽강’에서 놀던 방식처럼 꾸린 전시

“새벽강은 참 묘한 곳입니다. 2차로 당연히 가는 곳, 많은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곳입니다. 30여 년 ‘주당 인생’의 희로애락이 깊이 박혀 있는 곳이자, 제 문화력의 8할을 키워준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유대수 판화가)


3년 전부터 기획서를 만지작거리던 유대수는 작년 6월 새벽강에 자주 드나드는 후배들에게 ‘은자전’을 꺼냈다. “강은자 사장이 모은 미술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자.”라는 말에 김병수, 박규현, 박세혜, 박진희, 선지영, 양소영, 이경진, 정문성, 조은정, 최미진 등 20여 명이 모였다.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 이들은 자신의 방식에 맞춰 10년 넘게 새벽강을 즐겨왔으며, 문화판에서 허드렛일부터 버텨온 문화인력들이다. 몇 차례의 모임에서 시키지도 않은 역할을 나눠 맡고 하나둘 일을 처리해 나갔다. 소장작품 목록을 정리하고, 곳곳에 있는 자료들을 모아 각종 홍보물을 만들었다. 작품을 옮기고, 디스플레이하고, 전시 기간 내내 순번을 정해 도슨트를 맡았다. 새벽강에서 놀던 방식 그대로였다.  숱한 문화예술인들이 현장에서 손을 보탰다. 은자 씨를 오래 만나고, 새벽강을 길게 드나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자전’의 시작이었고, 그 발랄한 과정은 한 공동체의 연대기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새벽강’엔 언제나 은자가 산다

새벽강을 대표하는 미술 작품은 검은 뿔테 안경에 유쾌하게 웃고 있는 단발머리 여성을 나무에 새긴 목판화 <새벽강엔 은자가 산다>(작 유대수)이다. 작품 제목 속 ‘은자’는 은자 씨만을 칭하지 않는다. 새벽강을 드나들며 은자 씨를 연모하게 된 이들과 오랫동안 전주에 머물며 전주를 지켜온 은자(隱者)들일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새벽강에는 은자 씨가 있고, 삶의 위로와 그리움이 절절한 은자들은 여전히 새벽강을 찾아 또다른 문화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