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 ‘허산옥, 남쪽 창 아래서’   2026.2월호

시대에 가려진 이름, 남전을 다시 부르다




2025. 11. 14 – 2026. 2. 22

전북도립미술관 1-4전시실


남전 허산옥의 삶과 예술을 조명하는 전시가 있다. 전북도립미술관이 이어온 전북미술사 연구시리즈 다섯 번째 전시인 ‘허산옥, 남쪽 창 아래서’이다. 이번 전시는 시리즈 최초의 여성 작가로, 전통 수묵화의 정신을 지켜온 허산옥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4개 주제로 나누어 입체적으로 소개한다. 


허산옥 선생은 근현대기 격변의 시대를 지나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쌓은 인물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미술사의 변방에서 소외되어왔다. 그는 김제에서 태어나 남원권번에서 춤과 연주를 익힌 예인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전주 풍남문 근처에서 요릿집 ‘행원’을 운영했다. 당시 행원은 문인과 화가, 명인, 명창이 모이는 지역 예술인 교류의 중심지였다. 


그는 효산 이광열, 의재 허백련을 만나며 본격적인 미술의 길에 입문했다. 그의 아호인 ‘남전(藍田)’ 역시 ‘옥이 나는 땅처럼 귀한 삶의 결실을 얻으라’는 의미로 스승 허백련이 지어준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통회화의 정통성을 따르면서도 보다 부드럽고 균형 잡힌 미감을 드러낸다. 강하고 거칠면서도 유려한 필묵의 완급 조절은 허산옥 작품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힌다. 《국전》과 《전북도전》 등에 입선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그는 몇 차례의 개인전을 열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1970년대 후반부터는 완숙기에 접어들며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냈다. 색채의 비중이 커지고, 필선이 한층 대담해졌다. 사군자를 주로 그렸던 작품 세계는 장미, 목련, 모란 등 화려한 소재를 중심으로 한 화훼화로 확장되었다. 이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를 넘어 작가가 오랜 세월에 걸쳐 내면의 긴장을 풀어내고 평온으로 향하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남전 허산옥 



허산옥_묵국 (1980)



그러나 권번 출신의 여성으로, 화가로서의 면모는 시대의 편견 속에 가려졌다. 이번 전시는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일에서 출발한다. 국전 입선작을 비롯한 주요 작품, 관련 자료와 작가가 실제 사용하던 미술도구 등 다양한 아카이브를 전시하고 허산옥과 교류한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을 함께 소개한다. 이를 통해 전북 화단의 형성과 예술가 간의 관계망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전시장 한쪽 벽에는 남전 선생이 살아온 생애가 연보로 정리되어있다.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허산옥의 삶은 개인의 기록이 충분히 보존되지 못한 지역 미술사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시는 희미한 흔적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며 연구의 출발점을 마련하는데 의의를 뒀다. 


70세를 앞두고 있던 허산옥은 오랜 예술 여정을 돌아보는 회고전을 준비했으나, 개막을 앞둔 1993년 1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미배접 상태로 보관되던 말년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그가 마지막까지 남긴 그림에 대한 열정과 여운을 전한다. 이번 전시는 허산옥이라는 지역 여성 예술가의 존재를 미술사 속에 위치시키는 작업이자, 수면 아래에 있는 수많은 여성 작가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잊힌 화가를 길어 올리는 시도이기도 하다. 


전시는 풍남문 인근의 카페 행원에서도 연계하여 만날 수 있다. 작가가 실제 머물며 작업하고 교류했던 공간에서 연계 전시 ‘허산옥, 살구나무 아래서’를 진행한다. 현재 행원 소장자가 보유한 허산옥의 작품을 중심으로, ‘팔군자 병풍’, ‘매화’를 비롯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작가가 그려온 삶의 흔적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고다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