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회 마당기행ㅣ다시 역사기행 ② 백제역사유적지구   2026.6월호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백제


공주 공산성



백제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과서 속 삼국시대의 한 나라, 사비성 함락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왕국. 그러나 그것이 백제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공주와 부여, 익산에 남겨진 유적들은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멸망한 왕국의 흔적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와 교류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를 다시 바라보게 한 계기였다. 세계유산 등재 10년, 백제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우리에게는 가까이 있어 오히려 멀어진(?) 백제유적을 4월 '다시 역사기행'에서 만났다.





공산성 성곽을 걸으며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공산성이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금강과 맞닿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봄기운이 스며든 성곽길 사이로 꽃이 피어 있는 이곳은 웅진기 백제의 왕성이다. 북쪽으로 흐르는 금강과 급경사를 이루는 공산의 지형을 활용해 축조한 천연의 요새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의 왕궁지로 추정되는 공간과 연못 유적, 고려시대 창건된 영은사, 인조가 머물렀던 쌍수정 등이 남아 있다.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한 백제 기와와 토기, 고려·조선시대 유물도 다수 출토됐다. 현재 공산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석성이 함께 남아 있는데, 지금의 성곽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축조된 것이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이후에도 공산성은 북방 방어의 거점 역할을 이어갔고, 백제 멸망 직전 의자왕이 몸을 피했던 장소로도 전해진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백제는 4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 정책 속에서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맞섰지만, 결국 475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했다. 왕과 수도를 동시에 잃은 백제는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웅진, 지금의 공주로 천도한다. 


무령왕, 다시 강한 나라를 만들다

버스에서 공주 밤빵을 나누어 먹으며 향한 다음 행선지는 국립공주박물관. 이곳에서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웅진기 백제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다. 무령왕은 백제 중흥의 기반을 다진 왕으로 평가된다.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중앙의 지방 통제를 강화했고, 대외적으로도 공세적인 군사 전략을 펼치며 백제의 국력을 다시 끌어올렸다. 이러한 노력 끝에 무령왕은 521년(무령왕 21년) “갱위강국(更爲强國)”, 곧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



박물관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법종 교수의 설명과 함께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이었다. 지석은 단순한 기록물이 아니라 무덤의 주인과 조성 연대를 명확히 밝혀준 결정적인 자료였다. 덕분에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서도 그 주인이 확실하고 분명한 기준점을 가진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지석 옆에 놓인 진묘수도 눈길을 끌었다. 죽은 왕의 영혼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인 진묘수는 어딘가 귀엽고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한쪽 뒷발이 부러져 있다. 영혼을 지키는 존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일부러 훼손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설명도 이어졌다. 이외에도 은잔과 금관 등 화려한 유물들도 눈길을 끌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발굴 뒷이야기도 전해졌다. 도굴되지 않은 귀중한 유적이었지만 당시 발굴은 단 17시간 만에 급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한다. 특종 경쟁 속에 기자들이 왕릉 내부까지 들어왔고, 기록 사진도 충분히 남지 못했다. 이후 한국 고고학계는 무령왕릉 발굴을 중요한 반성의 사례로 삼으며 유적 조사와 기록 보존 원칙을 더욱 엄격하게 정비하게 되었다.


고대의 신도시, 부여 관북리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부여로 향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관북리유적이다. 북쪽으로 부소산성, 서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현재의 부여읍 시가지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는 부여현 관아가 자리했던 곳이기도 하다. 관북리유적에서는 백제 왕도 사비의 중심 시가지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막돌을 여러 단 쌓아 만든 연못과 남북·동서로 교차하는 도로망 일부가 발견되었고, 도로 가장자리에는 배수로 시설도 조성되어 있었다. 먹을 것을 보관하던 지하 창고와 공방터 등을 통해 이곳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고 백제가 체계적인 도시 계획 아래 도성 내부를 정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최근에도 329점에 달하는 목간과 함께 횡적이라 불리는 가로 피리 한 점이 새롭게 출토되었다. 천오백 년 전 백제 왕도의 일상이 여전히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웅진 천도가 급박한 피난에 가까웠다면, 사비 천도는 충분한 준비 끝에 이루어진 계획도시 건설이었다. 웅진은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지형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늘어나는 인구와 물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반면 사비는 넓은 평야와 수로를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보다 체계적인 왕도를 구축하기에 적합했다. 538년, 성왕은 사비 천도를 단행하며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바꾸었다. 부여의 정통 후손임을 강조하며 왕권과 국가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려 한 것이다. 이때부터 백제 멸망까지의 시기를 사비도읍기라 부른다. 사비는 방어에 취약한 지형이라는 약점이 있었지만, 백제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자연 능선을 활용한 나성을 축조했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도시 외곽을 방어했고, 내부는 바둑판처럼 정비된 도로망과 상하수도·배수시설을 갖춘 계획도시 형태로 조성했다. 오늘날 관북리유적에 남은 흔적들은 당시 백제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도시 설계 능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부여 정림사지



백제는 망하였으나 이 탑만은 

가람 이병기의 시조 「사비성을 찾는 길에」에는 그가 정림사지를 찾고 남긴 감상이 담겨 있다. "비록 백제는 망하였으나 / 이 예술품만은 아니 망하였다 / 당인의 필적이야 있든 없든 / 또한 평제든 아니든 / 탑은 탑대로 이름을 전한 것이다" 정림사지는 사비기 백제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공간이다. 하나의 탑과 금당이 일직선상에 놓인 ‘1탑 1금당’ 형식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연못을 지나 사찰로 들어가는 구조 역시 특징적이다. 인간 세계에서 미륵의 세계로 건너간다는 불교적 상징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공간 구성은 이후 찾은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이어진다.


현재 절터에는 국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만 남아 있다. 오늘날 국내에는 백제 시대의 건축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 장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운 사찰들 속에서만 당시 건축 양식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정림사지는 백제 건축의 원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돌로 만들어졌지만 전체 구조는 목탑의 기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백제가 목탑 중심의 건축에서 벗어나 석탑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정립해가던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부드럽게 뻗은 지붕돌 끝이 살짝 들린 모습은 마치 처마를 보는 듯 했다. 탑신 한 면에는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새긴 비문이 남아 있다. 당은 백제를 무너뜨렸음을 널리 알리고, 백제 사람들의 정신적인 어떤 것을 함께 지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석탑이면서 동시에 백제 멸망의 흔적을 품고 있는 셈이다.




백제금동대향로



하나의 향로에 담긴 백제의 세계 

지난해 12월 문을 연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전용 전시관인 ‘백제대향로관’은 이번 기행에서 가장 기대하던 장소 중 하나였다. 백제대향로관의 전시 방식은 인기를 끌었던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을 떠올리게 했다. 어두운 조도 속에 금동대향로 한 점만을 중심에 두고, 관람객이 조용히 유물에 집중하도록 구성했다. 전시를 지나면 ‘향·음’, ‘향·유’ 공간이 이어진다. ‘향·음’에서는 향로라는 주제에 맞춰 실제 향을 맡아볼 수 있고, 발굴 과정을 담은 영상도 상영된다. 또 향로에 표현된 다섯 연주자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고대 백제 악기의 소리를 헤드셋으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백제금동대향로의 진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점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었지만, 전시 전체의 밀도나 동선, 체험 요소가 인상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아쉬움이 남았다. 뮤지엄숍 또한 최근 '뮷즈'가 하나의 관람 경험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다소 오래된 기념품점 분위기에 머물러 있었다. 백제금동대향로처럼 강력한 상징성을 가진 유물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부분은 아쉽다. 




익산 미륵사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왕도

미륵사지로 향하기 전, 익산이 한때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될 뻔했던 도시라는 설명을 들었다. 백제 무왕은 익산에 새왕궁을 조성하며 새로운 왕도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실제로 익산 일대에는 왕궁리유적과 미륵사로 대표되는 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백제는 이미 웅진과 사비를 거치며 수도 이전을 경험한 나라였다. 무왕은 익산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도 계획은 끝내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고, 백제가 마지막까지 새로운 왕도를 꿈꾸었다는 흔적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미륵사지는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잘 안다고 여겼던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소풍 장소로 익숙했고, 서동설화를 통해 여러 예술 작품 속에서도 자주 만났던 곳이다. 그러나 다시 찾은 미륵사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미륵사는 중문과 탑, 금당이 일직선으로 놓인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세 개가 병렬로 배치된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그 규모 역시 압도적이다. 미륵사는 누구나 평등한 삶을 꿈꾸는 미륵하생 신앙을 구현하고자 한 공간이자, 모든 백성의 구원을 바랐던 백제인들의 염원이 담긴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본래 미륵사에는 세 기의 탑이 있었다. 중원의 목탑은 언제 사라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동탑 또한 발굴 당시 이미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동탑은 결국 1993년 완전히 새롭게 복원되었지만 복원 방식 등을 두고 논란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미륵사지 석탑은 서탑이다. 일제강점기 붕괴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를 덧씌웠던 탑은 2001년부터 해체·복원 작업에 들어가 2019년에야 긴 복원을 마쳤다. 전체 부재의 약 81퍼센트를 재사용했고, 원래는 9층 규모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남아 있던 6층까지만 복원했다. 오래된 콘크리트를 제거하고 전통 방식대로 석재를 다듬는 과정 자체가 긴 시간의 복원 기록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았다. 중요한 유물과 석조물 일부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채 전시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등하대석이나 노반덮개석 같은 유물은 설명 없이 지나치면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렵다. 특히 동탑의 노반덮개석은 동탑이 9층 석탑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한다. 조법종 교수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 의미를 미처 알지 못한 채 지나쳤을 것이다. 유적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만큼이나, 그것을 오늘의 관람객에게 어떻게 전달하고 이해시키는가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왕궁리의 견우와 직녀 

왕궁면에는 왕궁리유적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은 석상이 남아 있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이다. 두 석불이 약 200여 미터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서 있는데, 떨어져 지내던 두 석상이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고, 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고 한다. 막간에는 두 석불 가운데 어느 쪽이 남성이고 여성인지 맞히는 작은 퀴즈도 열렸다. 의견이 반반으로 갈린 가운데, 정답을 확인하기 위해 반대편 석상 앞으로 이동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쪽 석불에는 희미하게 수염이 남아 있어 남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불의 얼굴은 화려하거나 세련된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투박하고 소박한 인상이 강한데, 그런 점이 묘하게 정겹게 느껴졌다. 이 석상은 고려시대 이 지역에 정착했던 고구려 유민들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고구려 계통 사람들 사이에서 견우와 직녀 설화가 널리 사랑받았고, 그 정서가 이 석불 전설에도 이어졌다는 설명이었다.




 류나윤 기자 ㅣ 사진 김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