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 석탑
사람은 예로부터 강을 따라 살아왔고, 강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키워왔다. 전남을 가로지르는 영산강 역시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을 품어왔다. 이번 답사는 영산강 유역에 남겨진 신비로운 역사와 문화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조법종 교수와 함께하는 역사기행, 5월은 전남 나주와 화순을 찾았다. 천년목사골의 위세를 엿볼 수 있는 나주목 관아, 마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담긴 독널무덤, 수많은 돌부처와 탑이 기묘한 화순 운주사, 쌍봉사의 목탑과 철감선사탑까지. 영산강을 중심으로 꽃피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나섰다.
천년목사골 나주의 위세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나주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어졌다. 그만큼 나주는 오랫동안 호남을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영산강 유역의 비옥한 평야를 바탕으로 농업이 발달하여 풍요로웠다. 본격적인 중심지로 자리 잡은 것은 고려 성종 때다. 당시 전국 12목 가운데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됐고, 이후 약 천 년 동안 호남 행정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목사가 이곳에 부임해 지역을 다스렸으며, 그래서 지금도 나주를 ‘천년목사골’이라 부른다.
그 오랜 위세는 나주목관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의 건물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거나 철거됐지만,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만 보아도 당시 규모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나주목사가 생활하던 내아인 금학헌과 관문 역할을 했던 정수루가 남아 있으며, 주변으로 나주읍성과 향교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객사인 금성관이다. 보수공사 중이어서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멀리서도 웅장한 규모가 느껴진다. 전주의 풍패지관으로 익숙한 객사는 그동안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금성관을 통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셨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 중앙에서 내려온 사신과 관리들이 머무는 장소이기도 했다. 금성관은 근대에 들어 나주 사람들의 항일 정신을 상징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이 출병식을 열었고, 명성황후 시해 이후에는 추모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단발령에 항거한 의병 활동과 나주학생독립운동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관아에 상주하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나주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나주목관아 금성관
곰탕 한 그릇에 담긴 나주의 역사
'모양은 전주요, 맛은 나주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전주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표현이지만, 나주 역시 손꼽히는 맛의 고장인 것은 분명하다. 곰탕과 장어, 홍어가 특히 유명한데 기행단은 그중에서도 나주곰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나주목 관아 인근에는 나주곰탕거리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날 찾은 곳은 1910년 문을 연 노포였다. 나주곰탕은 밥과 국을 여러 번 오가며 데우는 토렴 과정을 거친 뒤 계란지단과 대파를 올려 낸다. 맑은 국물 속에 고기의 깊은 맛이 담겨 있어 오랫동안 나주의 대표 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다.
나주곰탕의 유래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은 나주에 군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을 세웠다. 이곳에서 대량의 소가 도축됐는데, 남은 부산물은 값싸게 조선인들에게 판매됐다. 사람들은 부산물에 붙은 살코기를 발라 국밥을 끓여 먹었고, 이것이 오늘날 나주곰탕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나주곰탕은 소뼈 대신 고기 중심으로 육수를 낸다.
독 안의 사람들
고대 나주의 주인공은 영산강 유역에 살았던 마한 사람들이었다. 전주가 후백제 역사문화권을 대표하는 도시라면, 나주는 마한 역사문화권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다. 마한은 여러 소국이 모여 형성된 연맹체로, 영산강 유역에서는 백제의 영향 아래에서도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이어갔다.
그 흔적을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남고분군 한가운데 자리한 국립나주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고분문화실에 전시된 독널(옹관)이다. 영산강 유역 사람들은 시신을 묻을 때 흙으로 만든 독널을 사용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례 문화다. 특히 아파트처럼 하나의 거대한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독널을 함께 배치한 점이 흥미롭다. 가까운 혈연관계의 사람들이 함께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의 가족묘를 떠올리게 한다. 전시실에는 여러 고분에서 출토된 대형 독널이 전시돼 있으며, 함께 출토된 금동관도 볼 수 있어 당시 지배층의 위상도 짐작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독널을 만들고 옮긴 과정이 궁금하던 찰나, 뜻밖에 반가운 이름도 들을 수 있었다. 진안의 옹기장 이현배다.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는 이현배 옹기장과 함께 고대 옹관 제작 기술을 복원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수백 킬로그램에 이르는 대형 옹관이 오랜 연구 끝에 실제로 재현되었다.

국립나주박물관 고분문화실
천불천탑의 염원이 깃든 절집
신비에 둘러싸인 절, 운주사. 이곳에는 천왕문도, 사천왕상도 없다. 일반적인 절집의 형식과는 많이 벗어나 있다. 다만 깊은 산자락 곳곳에 수많은 불상과 불탑이 자리하고 있다. 오랜 수수께끼가 가득한 운주사는 흔히 '천불천탑'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80여 기만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라는 기록이 있어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탑과 돌부처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뿐이다.
일주문 아래의 거북상을 쓰다듬고 문을 지나자 구층석탑을 비롯한 여러 석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탑들이 계곡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어떤 탑은 산비탈에 기대어 있고, 어떤 탑은 땅에 박힌 돌을 그대로 기단 삼아 서 있다. 가까이 보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석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층수도 제각각이고, 둥근 원반이나 항아리처럼 생긴 돌을 쌓아 올린 탑도 보인다. 정교하고 균형 잡힌 아름다움보다는 기묘하고 자유로운 기운이 먼저 느껴졌다.
탑에 새겨진 문양도 눈길을 끈다. 익숙한 불교 문양 대신 마름모꼴, X자, V자 같은 기하학적 무늬들이 반복된다. 특히 X자 문양은 몽골의 이동식 가옥인 게르의 골조를 닮아, 몽골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불상과 탑들은 대체로 12~13세기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와 신라의 흔적이 뒤섞인 듯하면서도 어느 한 양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운주사가 유독 낯설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했다.
불경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곳의 불상은 대부분 못(?)생겼다. 투박하고 어딘가 서툴러 보이는 그런 불상들이다. 높이 12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부터 사람 키만 한 석불, 작은 석불들까지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몸은 납작하고 팔다리 비례도 어색하다. 익숙하게 보아온 온화하면서도 위엄 있는 부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신적인 존재라기보다 우리 곁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느껴지니 정감 있어 좋다.
이런 기묘함 때문인지 운주사를 둘러싼 이야기는 유난히 많다.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보고 창건하여 하룻밤 사이 천불천탑을 세우려 했다는 전설부터, 고려시대 항몽의 염원을 담아 조성했다는 설, 밀교와 관련되었다는 해석까지 다양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천민들이 미륵의 강림을 기원하며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운주사 와불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와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 불상은 거대한 바위처럼 산등성이에 나란히 누워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사실은 '와불'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래는 세워질 예정이었던 불상들이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남아 지금의 와불이 되었다. 이와 관련한 전설도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사이 천불천탑을 완성해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지만, 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일하기 싫었던 동자승이 닭 울음소리를 냈다고 한다. 석수장이들은 날이 밝은 줄 알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고, 그 결과 마지막 두 불상은 세워지지 못한 채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전해지기로는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 세계가 열린단다. 그날이 언제일까 궁금해진다.
운주사를 둘러싼 수많은 전설의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산길 끝에서 마주한 와불을 바라보고 있으니 왜 사람들이 이곳에 의미를 부여하고 상상력을 덧입혀 왔는지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부처들은 지금도 언젠가 올지 모를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있다.
철감선사의 발자취를 따라, 쌍봉사
운주사를 둘러본 뒤 찾은 곳은 화순 쌍봉사다. 신라 말 선종의 큰 스승인 철감선사와 인연이 깊은 사찰로, 국보인 철감선사탑과 보기 드문 목탑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마침 석가탄신일을 앞둔 시기여서 경내는 등을 달고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역시 3층 목탑이다. 현판에 ‘대웅전’이라 적혀 있고 불상을 모시고 있지만 이 건물은 목탑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드문 목탑형 건축물로 꼽히는 만큼 그 의미도 크다. 탑이라기에는 건물 같고, 건물이라기에는 탑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래의 건물은 1984년 화재로 소실됐지만, 당시 불상만은 지나가던 주민이 불길 속에서 꺼내 무사히 보존할 수 있었다. 다행히 건물의 구조를 기록한 자료와 사진이 남아 있어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쌍봉사 3층 목탑
철감선사탑
절 뒤편 차나무들을 따라 올라가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철감선사탑과 철감선사탑비를 만날 수 있다. 철감선사탑은 부도이기도 한데, 부도는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무덤이다. 그 옆의 탑비는 철감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쌍봉사의 철감선사는 김제 모악산 귀신사에서 출가해 10년 동안 화엄학을 공부했다고 하니 전북과도 인연이 깊다. 이후 당나라로 건너가 수행과 학문을 이어갔으며, 귀국한 뒤에는 쌍봉사에 머물며 선종의 가르침을 널리 펼쳤다. 절 자체는 철감선사가 오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머물던 시기에 사세가 크게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탑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곳곳에 새겨진 조각이 놀라울 만큼 섬세하다. 기단부터 탑신, 지붕돌까지 여러 문양과 비천상들이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기술을 짐작하게 한다.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단번에 느낄 수 있는 섬세함이다. 탑비의 조각도 매우 인상적이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나름의 표정이 있고 오른쪽 앞발 한쪽을 살짝 들어 올린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걸어 나갈 것처럼 생동감 있다. 머릿돌 또한 용과 용을 둘러싼 섬세한 문양까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상처도 남아 있다. 탑에서 비천상이 새겨진 자리는 일부가 떨어져 나가 원래 모습을 잃었고, 일부는 사리장치를 탐내던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탑비 또한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는데, 과거에는 비석을 떼어다 조상 무덤에 사용하기도 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문화유산은 아름다움만큼이나 수난의 흔적을 함께 품고 있다.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을 후대에까지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된 여정이었다.
글 류나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