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 수 있는 모든 것의 이야기   2024.4월호

어느 날 회장님이 녹차밭을 심자고 하셨다




장원 서성환. 그는 ‘아모레퍼시픽’ 아니 그전에 ‘태평양 화학’을 만들며 우리나라 화장품 산업을 일으킨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동백기름을 짜서 만든 머릿기름을 자전거로 배달하였고, 그걸 화장품 사업으로 일으켜 세계적으로 성공을 시켰다. 그런 그가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뱉은 한 마디는 회사에 충격을 주었다. “차 사업을 하고 싶소, 녹차사업을 하고 싶네.”


1970년대의 일이다. 서성환 회장은 임원들과의 자리에서 ‘녹차사업’을 하자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녹차는 사업이 될 수 없습니다. 취미생활이면 몰라도.”라는 말과 함께 3시간 동안 반대의견이 쏟아졌다. 회장님은 그 많은 사업 중에 왜 녹차사업을 주장한 것일까?


그것은 화장품 사업으로 여러 나라에 출장을 간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방문하는 나라마다 식물원을 들릴 정도로 식물을 사랑했다. 또 각 나라마다 건네주는 차 문화에 깊이 빠졌다. 한편으로는 ‘왜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시작한 차문화가 없어진 것이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에게 녹차는 잃어버린 전통이었다. “차 사업이 돈을 당장 버는 사업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아니 계속 적자가 날 것이야.” 가만히 반대를 견디던 서성환 회장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지만 녹차 사업이 성공하면 태평양은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될 것이오.”


회장님이 제주에 황무지를 샀다 문제가 생겼다 아주 많이

결국 서성환 회장이 직접 녹차 사업을 진행하였다. 평소에도 커피보다 차를 많이 마시던 그였다. 하지만 차를 마시는 일과 차나무를 기르고, 녹차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그는 녹차를 만드는 서양원 명인을 찾아가 함께 ‘설록차’라는 브랜드를 계획했다. 그리고 녹차를 대량으로 기를 토지를 찾기 시작했다. 


1979년, 대망의 첫 삽을 뜨게 되었다. 설록차가 길러질 첫 번째 농장은 ‘제주도’ 한라산 산기슭이었다. 이곳의 기후가 차가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토지(라고 쓰고 황무지라 부른다)가 너무 척박했다는 것이다. 녹차는커녕 선인장도 못 자랄 거 같은데? 녹차사업의 가장 큰 고생은 이곳에서 시작했다. 기계를 투입하기가 어려워지자 사람이 직접 돌과 잡목을 걷어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야 했고, 퇴비를 구하러 양계장을 돌아다니다가 나중에는 직접 양계장을 차렸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국세청에 신고를 했다. 태평양 회장이 땅투기를 하는 것 같다고(아무도 그가 녹차밭을 만든다는 걸 믿지 않았다). 그렇게 우여곡절의 4년이 흘렀다. 1983년 설록차의 첫 번째 찻 잎이 수확되었다. 이제 한국은 전통을 찾고, 녹차를 마시는 나라가 되었냐고? 녹차를 처음 맛본 사람들은 말했다.


이런 시래기 삶은 물을 누가 마십니까

우리 민족에게 녹차란 분명 전통차였다. 기록만 봐도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녹차와 다도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불교를 억누르던 조선시대에 이 전통은 사라지게 되었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은 숭늉과 보리차처럼 구수한 맛의 음료가 되었다. 오늘날로 치면 아이스아메리카노가 그 대를 이었다고 할까? 설록차를 출시한 태평양은 대중을 대상으로 ‘백만인 무료 시음회’를 열었다. 하지만 마신 사람의 3분의 1 정도는 “무슨 시래기 삶은 물을 돈 주고 사 먹으라고 하냐!”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마시기에 녹차의 쓰고, 떫은맛은 너무도 어려웠다고 할까?


이번에는 황무지 같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태평양에서는 ‘설록차(주간 다보)’라는 녹차 전문 잡지를 창간했다. 그리고 녹차는 잃어버린 우리 문화라는 것을 알렸다. 동시에 방문판매요원을 가정마다 투입시켜 한국녹차를 알렸다. 80년대 초중반 태평양은 대중을 대상으로 다도강좌를 열고, 시음회를 열었다. 이러한 노력에 경영진은 이런 평가를 남겼다. “투자는 엄청난데, 수익은 초라하다.”


하지만 이후 녹차는 90년대를 기점으로 ‘건강음료’가 되기 시작한다. 다양한 녹차음료가 티백 형태로 나올 때 설록차는 오히려 ‘선물용 고급음료’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황무지로 시작한 녹차밭은 이제 100만 평이 되고, 이 밭들이 모두 유기농으로 전환되었다. 무모하다는 주변의 평가에도 녹차의 맛은 계속 올랐다. 그리고 해외에서 설록차의 맛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각종 국제 차대회에서 수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의 의구심에서 태어난 설록차는 한국녹차의 기원(Origin)을 담은 감탄사(Oh)를 부르는 녹차 ‘오설록’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두의 걱정거리에서 세계의 명차로

40년의 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우리는 녹차보다는 아메리카노가 익숙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사용할 때, 혹은 카페인을 피해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을 때,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여행을 갔을 때 우린 ‘오설록’을 찾는다. 제주를 대표하는 ‘오설록 티 뮤지엄’의 한쪽에는 故서성환 회장의 동상이 있다.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에도 아들들을 하와이 ‘Dole 파인애플 박물관’에 데려가며 녹차 박물관에 대한 의지를 말하던 그였다. 제주의 녹차밭이 더욱 푸른 이유는 차에 대한 그의 ‘아름다운 집념’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