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초록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는 이 초록병을 보면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르며 추억에 잠기곤 한다. 이렇게 말했더니 누군가 그랬다. “할머니가 주신 참기름 병이군요.” 다시 한번 말하겠다. 오늘은 한국인이 두 번째로 좋아하는 ‘초록병’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소주다. 특히 이 제품은 모든 소주병을 초록색으로 만든 기념비적인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다.
팔도에 대장이 따로 있던 소주춘추전국시대
서울에서는 진로, 부산에서는 대선. 과거에는 동네마다 대장 소주가 있었다. 1976년 정부에서는 지역에 있는 소주 업체 하나가 지역 소주의 50%의 점유율을 주는 하나의 ‘1도 1사’라는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서는 현재의 처음처럼의 전신인 ‘경월소주’가 있었다. 1993년 경월소주를 인수한 두산은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다. 병이 초록색인 소주 ‘그린소주’다. 그때 당시만 해도 소주병들은 투명하거나 약간 푸른빛을 띠었으니 참신한 색깔이었다. 뭔가 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고 할까? 그런데 1997년 그린소주의 기회가 열린다. ‘1도 1사 정책’인 지역소주판매제도가 위헌판정이 나며 어느 지역이든 자유롭게 팔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강원도 짱 그린소주가 이제 서울에 도전장을 내러 떠난다.
초록색 소주의 혁명 진로를 이기다
1997년 그린소주는 수도권 점유율 31.1%라는 놀라운 성과를 가져온다. 돌이켜보면 이 당시 소주들은 다양성을 추구하던 시대다. 소주에 꿀을 넣기도 하고, 목통에 숙성을 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모두 IMF가 와서 망해버린 것이 함정. 하지만 그린소주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그린타임’이라는 이벤트를 연 것이다. 매주 목요일부터 토요일 저녁 8-9시에 술집에서 그린소주를 주문하면 소주값을 회사가 대신 내주는 파격적인 마케팅이다. IMF로 주머니 사정이 어려웠던 그 시대 그린소주는 사람들의 위안이 되었다.
그러던 1998년 충격의 결과가 발표된다. 대한주류공업협회에서 그린소주가 소주 판매량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불이 붙은 진로와 그린소주는 서로 디스 아닌 디스를 주고받았다. 그린소주는 광고에서 진로를 연상시키는 병을 놓고 ‘흘러간 노래’라고 표현했다. 진로의 광고는 ‘왜 그린(런) 소주를 마셨는지 모르겠다’라는 문구로 응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지금의 우리는 ‘그린소주’를 기억하지 못하냐고? 바로 이 제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참이슬의 등장과 초록병의 시대
1998년 진로는 게임 체인저를 발표했다. ‘참진이슬로’ 바로 오늘날 ‘참이슬’이라고 부르는 소주다. 대나무 숯 여과공법, 23도의 (상대적) 낮은 도수, 그리고 초록색 병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린소주의 초록병 전략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모든 면에서 더 나은 제품이었다. 참이슬은 출시 6개월 만에 1억 병 판매를 돌파했고, 소주시장의 1위를 탈환했다. 더 중요한 것은 참이슬을 기점으로 모든 소주회사들이 초록병을 채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모두가 초록병을 쓰니 마시고 남은 공병을 회수해서 재사용하기도 쉬워졌다. 아이러니하게 초록병으로 시작한 그린소주만이 이 장점을 받을 수 없었다. 차별화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린소주는 뉴 그린소주로, 산소주로 만들어지다가 시장에서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도 이 계보는 ‘처음처럼’으로 다시 전성기를 찾는다). 그렇게 한국인이 모두 잊은 그린소주는 ‘이곳’에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게 된다.
경월그린, 일본의 2등 브랜드가 되다
그린소주가 잊힌 현재지만 일본의 술집에 가면 이 녀석을 만날 수 있다. 1995년 일본의 산토리와 계약을 맺고 수출을 시작했던 그린소주는 ‘경월그린’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시장을 공략했다. 일찍이 일본에 자리를 잡으며 ‘한국에서 만들어진 프리미엄 소주’라는 이미지로 인기를 끌었다. 일본 내 한국 소주 점유율 1위는 물론 일본의 전체 희석식 소주 판매량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한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경월그린의 광고가 따로 있을 정도다. 때문에 지난해에는 경월그린이 한국에 역수입이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특히나 요즘처럼 K열풍으로 해외의 소주 구매량이 늘어나는 지금. 경월그린은 다른 제품보다 먼저 미래에 간 것이 아닐까?
브랜드를 브랜드로 남게 하는 당신의 색깔은?
그린소주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한 곳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실패할 것이란 법은 없다는 것이다. 남과 다른 우리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당신의 하루하루에도 색깔 있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