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4.5월호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자연을 응시하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김경태 
 영화평론가




영화는 도쿄 인근에 위치한 산골 마을 하라사와의 고요한 겨울 숲속 풍경을 거니는 8살 소녀 ‘하나(니시카와 료)’의 시선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학교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자연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방과 후, 아이들은 모여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를 하지만, 하나는 그들과 어울리지도, 매번 늦는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걸어서 숲으로 간다. 그곳에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처음 마주한 듯, 나무와 사슴의 흔적, 그리고 숲속 끝의 얼어붙은 호수 주변을 유심히 지켜본다. 이처럼 하나는 그곳을 처음 목격하는 관객의 무지한 눈높이에서 안내를 맡고 있다.


하나의 아버지인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직업이 불확실하지만 마을의 심부름꾼으로 통한다. 그만큼 마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초반에 타쿠미가 장작을 패는 장면을 상세히 보여준다. 그는 능숙하게 나무를 다룬다. 뒤이어 우동가게를 하는 마을 주민을 위해 깊은 산속의 샘물을 떠서 통에 담는 장면이 길게 이어진다. 하나가 자연의 관찰자라면, 타쿠미는 자연의 동조자이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을 취득하며 그 일부로 살아간다. 


영화는 타쿠미와 하나의 별일 없는 일상을 진득하게 지켜본다. 그런데 가끔씩 카메라는 의외의 위치에서 인물들을 응시하고 불필요해 보는 숏이 롱테이크로 지속되기도 한다. 즉, 카메라는 인간중심적으로 통제된 관습적인 시선으로부터 간간히 벗어나며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한다. 일례로, 홀로 먼저 하교를 해버린 하나를 찾아 숲속에 들어온 타쿠미를 수평 트랙킹 숏으로 촬영하던 카메라는 그를 가려버릴 만큼 높은 둔덕을 만나지만 멈추지 않는다. 어느덧 그가 다시 등장했을 때는 하나를 등에 업고 있다. 마치 자연 속에서 흐르는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나아가, 등장인물의 감정에 쉬이 달라붙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향한 관객의 정서적 동화를 차단하는 듯한 몽환적인 음악이 그러한 특징을 강조한다. 영화는 느리고, 또 낯설게 자연의 시간을 구축한다. 


하라사와에 클램핑장을 짓고자 하는 회사의 직원들인 ‘타카하시(코사카 류지)’와 ‘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가 설명회를 마친 후에 주민들의 반발이 심하자 조언을 구하기 위해 타쿠미를 찾아온다. 타쿠미는 글램핑 예정지에 사슴이 다니기 때문에 3미터 높이의 울타리가 필요하며, 또한 사슴은 겁이 많아 사람을 보면 도망간다고 말한다. 어차피 사람이 있는 곳에 오지 않을 테니 울타리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은 모순적이다. 물론, 총에 빗맞아 도망치기 힘든 상황이라면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마유즈미가 사람과 사슴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병을 옮길 수 있기 때문에 사슴을 건들면 안 된다고 반대한다. 사람을 보면 도망치기 때문에 건들 일이 없지 않냐고 반문한다. 결국, 타쿠미는 그렇다면 사슴은 어디로 가야하냐고 묻는다. 그의 허술한 논리는 어떻게든 사슴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앞서있음을 단적으로 제시한다.


방과 후에 홀로 하교한 후 실종된 하나를 찾기 위해 온 마을 주민들이 동원된다. 마침내 타쿠미와 타카하시가 총상을 입은 사슴과 마주보고 있는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는 겁 없이 사슴에게 다가간다. 타쿠미가 말했듯, 총에 빗맞은 사슴은 공격적일 수 있기에 타카하시가 말리려고 나서자, 타쿠미가 그의 목을 졸라 기절시킨다. 딸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도우려던 사람을 과도하게 막는 건 분명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결국 그가 지키려고 한 대상은 혈육인 딸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사슴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 중심적으로 판단을 내린 건지도 모른다. 뒤늦게, 누워있는 하나에게 다가가 생사를 확인한 뒤 그녀를 안고 달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아주 멀찍이에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이내 인간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는 듯 밤하늘을 응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