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2024.6월호

자아를 버리고 존재를 내던지는 사랑의 화신

차이콥스키의 아내



김경태
 영화평론가




19세기 후반, 러시아 귀족 가문의 딸 ‘안토니나(일리오나 미하일로바)’는 사교 모임에서 유명 작곡가인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애초에 차이콥스키가 누구인지 몰랐던 그녀이기에 그에 대한 사랑은 그의 예술적 재능이나 명성에 대한 동경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다. 운명적으로 그에게 끌렸을 뿐, 사랑에는 어떤 이유가 없다. 그녀의 진심어린 고백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한 번도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으며 성격도 까칠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구애를 멈추지 않았고 모든 것을 감수하며 그를 뒷받침하겠다고 다짐한다. 마침내 그의 청혼을 받아낸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 차이콥스키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하며 안토니나를 외롭게 한다. 심지어 그녀의 목을 조르며 잠자리도 거부한다. 견디다 못한 그는 작곡을 핑계로 그녀로부터 멀리 도망치고서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절망하는 그녀에게 차이콥스키의 여동생은 그가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동성애자라라고 말한다. 사실 안토니나는 앞서 여러 정황들로 이미 눈치를 챘으나 애써 외면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 사랑은 신만이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녀는 기도에 매달리며 신에게 의지해 사랑을 지켜낼 힘을 얻는다.


당시 러시아에서 혼인한 여성은 독자적 여권 없이 남편의 여권에 이름을 올려야만 했고, 그만큼 이혼 절차도 까다로웠다. 혼인 관계가 지속될 수 없는 명확한 귀책사유가 없다면 이혼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차이콥스키의 변호사 측에서는 안토니나에게 그의 외도를 이혼 사유로 인정한다는 거짓 문서에 서명을 요구한다. 그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면서까지 이혼을 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부한다. 이제 안토니나는 끝까지 차이콥스키를 두둔하며 그녀의 아내로 살고자 결심한다. 이혼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차이콥스키는 모욕적인 말들로 상처를 준다. 그녀의 이혼 거부는 자기 없이 행복한 차이콥스키를 지켜볼 수 없다는 비뚤어진 복수심이나 미련 때문이 아니다. 이미 그녀는 독립된 여성이기를 포기하고 차이콥스키의 아내라는 정체성에 자신을 온전히 던졌다. 따라서 아내라는 자리에 대한 집착과 고수는 감정의 문제를 넘어 존재적 차원에 놓여있다. 그녀의 자아는 그에게 흡수되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고로 이혼은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존재의 절멸이기에 죽음과 다름없다. 차이콥스키가 없다면 안토니나도 없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변호사 ‘블라디미르’와 동거를 시작하고 그의 아이를 셋이나 낳는다. 그럼에도 자신을 만나주지조차 않는 차이콥스키가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라고 못을 박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면전에 대놓고 말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겨버린다. 블라디미르는 그저 차이콥스키와 재결합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한편, 태양을 사랑하면서 뜨겁다고 불편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는 차이콥스키의 친구는 그녀 앞에 근육질의 남성들을 불러 세워 옷을 모두 벗긴다. 그래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농락할 뿐이다. 그녀의 사랑은 한낱 남성적인 외모에 끌리는 본능과는 다르다.


떨어져 있는 몇 년 동안, 음악가로서 차이콥스키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진다. 반면 안토니나의 삶은 점점 더 황폐해진다. 블라디미르는 죽고 집은 불에 타버린다. 결혼반지마저 화염 속에 휩싸여 사라져버렸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사망 소식을 신문팔이 소년의 호외로 알게 된다. 영화는 신문을 손에 쥐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다.